발표된 詩

|詩| 왕만두와 한국 동창회 소식

서 량 2021. 6. 11. 19:51

어젯밤부터 지금껏 비가 내린다

가랑비 같기도 이슬비 같기도 한 가을비

베어 마운틴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안개 속에서

나는 배가 출출하다

뉴저지 한미 슈퍼마켓에서 산 왕만두를

마이크로 오븐에서 2분동안 덥히는 중

어제 못한 메일 체크를 오늘에야 한다

한국 동창회 소식 뉴스레터가 왔구나

 

솔직히 말해서 왕만두 속에 들어있는 눅진눅진한 김치는 맛대가리가 없다 왕만두 밀가루 배를 외과 수술칼로 쭉 짼 다음 새빨간 고춧가루 김치 냉장고 햇김치를 속에 쑤셔 넣어 먹는다 냠냠 이제야 김치 왕만두 맛이 제대로 나는구나 내 6년 대학 후배들이 한국 뇌종양 학회장이며 간질학회 차기회장에 선출됐다는 기사를 읽는다 내 동기동창 박찬일이가 대한 암학회 이사장으로 선임됐구나 옛날 청량리 예과 시절 바람 부는 당구장 근처를 우울한 귀족처럼 배회하던 아하, 내 동기동창들을 위하여 동창회장은 말한다 존경하는 국내외 동창회원 여러분

 

미국에서 가을비가 내릴 때마다 마음이 축축해진다

비단 안개가 하늘에서 내려와 베어 마운틴 마루턱을

양키식으로 쭉쭉 애무하는 저녁 퇴근 길에서

나는 집에 오는 내내 왕만두를 생각한다

가볍게 쥔 주먹보다 약간 클까 말까 하는

내 쭈글쭈글한 이중언어 대뇌를

반 시간도 넘게 지배하는 토실토실한 김치 왕만두

 

© 서 량 2002.09.23

--- 두 번째 시집 <브롱스 파크웨이의 운동화>에서 (문학사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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