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환자 약의 복용량을 놓고 다른 정신과의사와 회의석상에서 토론이 벌어진다. 의사들의 처방습관에도 어쩔 수 없이 각자각자의 성격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토론이 논쟁으로 변한다. 약의 효능보다 부작용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변론이 나온다. 어차피 아무리 약을 써도 증상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 것이 ‘정신분열증’이니까 아예 미리부터 약의 부작용이나 방지하자는 속셈이 내보인다. 적극적으로 병의 증세를 호전시키는 약물투여는 관심 밖이다.
나는 2010년부터 한국에서 통용되는 ‘조현증’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못하다. 사람 뇌의 신경구조가 현악기가 아닌 이상 조현(調絃)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올들어 어느덧 46년째 정신과의사로 일하고 있지만 정신분열증이 뇌질환이라는 단정을 내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환자의 두뇌장애와 약물치료 차원 외에도 가정이나 사회환경이 주는 스트레스가 정신상태에 끼치는 막대한 영향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다.
부작용 방지를 위하여 미리부터 복용량을 적게 처방하는 의료행위는 아스피린 적정량 두 알 대신 위장장해 부작용을 막으려고 한 알만 먹는 비효율적인 행동이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투여량이 왜 이리 높냐는 질문이 나온다. 교과서가 명시하는 하루 최대 복용량의 상한선을 넘지 않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누군가 뒤에서 킥 웃는다
셰익스피어의 사극(史劇) ‘헨리 4세’에 나오는 대사에서 유래한 ‘Discretion is the better part of valor’라는 말이 생각난다. 의역으로는, ‘진정한 용기는 신중함에 있다’. 매사에 함부로 만용을 부리지 말고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서 안전을 기하라는 교훈이다.
때는 바야흐로 15세기 초. 헨리 5세가 될 운명을 타고난 왕자 할(Hal)의 친구인 폴스타프(Falstaff)는 반란을 일으킨 핫스퍼(Hotspur)와 칼싸움을 벌이기도 전에 누워서 죽은 시늉을 한다. 그리고 저 유명한 ‘신중 예찬론’을 설파한다. 그래서 자기는 목숨을 건졌다고 변명한다. 참 치사하고 구차스러운 목숨이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까’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양지 바른 앞마당 장독대 간장독에 구더기들이 둥둥 떠 있는 것을 몇 번 본적이 있다. 어머니는 국자로 구더기를 건져서 펌프 곁 하수도에 버리셨다.
코로나 백신이 전 병원 환자는 물론 모든 직원들에게 접종되는 2021년 3월이다. 병동 직원들 중에 몇명이 아직도 부작용이 무서워 백신을 맞기를 거부한다. 교통사고가 무서우면 운전을 하지 말아야지! 하며 동료에게 짐짓 웃으며 말한다.
용기라는 뜻으로 흔히 쓰이는 ‘courage’는 ‘heart’와 어원이 같다. ‘cardiac arrest, 심장마비’할 때의 ‘cardiac’과 같은 어원이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지! ‘valor, 용기’는 ‘value, 가치’와 말의 뿌리가 같다. 뚜렷한 가치관이 용기를 일으키는 불씨가 된다. 원칙에 입각한 가치관이 없는데 용기는 무슨 용기?
근 한시간을 마스크를 쓴 채 조곤조곤 그러나 소신껏 떠들어댔다. 기분이 많이 상한 듯한 상관의 표정을 보면서 겁이 났다. 그의 의견 대로 비록 지금 약의 부작용은 없지만 복용량을 줄이겠다고 나는 공손하게 말한다. 그리고 ‘Discretion is the better part of valor’라 속으로 뇌까린다. 셰익스피어의 폴스타프가 한 말이다. 내가 자신에게 내린 아주 비겁한 처방이었다.
©서 량 2021.03.07
-- 뉴욕 중앙일보 2021년 3월 10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156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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