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80. 언힌지드

서 량 2021. 1. 11. 12:02

 

러셀 크로가 주연한 2020년 영화 ‘Unhinged’가 한국에서 번역 없이 그냥 ‘언힌지드’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것을 알았다. 영한사전은 ‘경첩을 뗀, 불안정한, 혼란한’이라 풀이한다. ‘unhinged’는 슬랭으로 미쳤다는 뜻으로 매우 모욕적인 말이다. 경첩이 떨어져 나간 문을 상상해 보라. 제대로 닫히지 않아서 제 구실을 못하는 문의 황량함을 생각해 보라.

 

신호등 앞에서 꿈지럭대는 앞차에게 빵~ 하고 경적을 울린 여주인공이 심한 보복을 당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무서운 속도로 쫓아온 앞차 운전수 러셀 크로는 사과를 요구한다. 그녀는 차갑게 거절한다. 분노에 찬 그가 줄기차게 그녀의 가족과 연고자를 해코지하고 죽인다.

 

‘unhinged’를 ‘뚜껑이 열리다’, 또는 ‘꼭지가 돌다’라고 본 뜻에 가깝게 옮길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노조절장애라는 정신과 진단명이 내 직업의식을 집적거린다. 뚜껑이 열리고 꼭지가 도는 사람들 모습이 코로나 판데믹에 처한 미국과 한국 사회를 도배질하고 있다.

 

2021년 1월 8일 뉴욕 CBS 탐사보도 ’60 minutes’에 출연한 연방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는 도날드 트럼프를 ‘deranged, unhinged, dangerous’ 즉, 궤도를 이탈하고, 경첩이 떨어지고, 위험하다고 공격했다. 트럼프 추종자들이 이틀 전 국회의사당에 난입해서 소동을 일으킨 상황을 그가 선동했다는 혐의에서다.

 

분노는 좌절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외부로 표출하는 것이 분노라면 좌절은 속을 썩이는 감성이다. 우리는 속을 썩이는 미덕과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억지를 부리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시대를 산다.

 

자기주장 차원에서 분노는 자아를 보호하는 셀프 디펜스다. 분노는 훌륭한 동기의식으로 변하는 진화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오래전 시인 기형도가 “질투는 나의 힘!”이라 했듯이 나도 이렇게 외친다. -- "분노는 나의 힘!"

 

분노조절장애는 그 에피소드가 얼마나 심한 강도로 자주 일어나느냐 하는 사항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1년에 한두 번 격하게 뚜껑이 열리는 경우에 정신질환 진단을 받지는 않는다.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가 오래 지속되는 환경에서 왕왕 분노를 터뜨리는 인지상정에 동조한다.

 

성미가 급한 사람일 수록 분노조절장애 에피소드 횟수가 빈번하고 심각한 판단장애가 일어나서 경첩이 망가진 문짝처럼 인격이 삐걱거리는 지경에 빠진다. 마스크를 하지 않았을 때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불청객이 몸을 침범하듯 문이 닫히지 않은 집에 도둑이 들어서는 현상이 일어난다. ‘언힌지드’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정신상태다.

 

‘hinge,경첩, 돌쩌귀’는 14세기 말부터 고대영어에서 쓰이기 시작한 단어로서 ‘hang, 매달다, 매달리다’와 말뿌리가 같다.  ‘hinge on’은 무엇에 의존한다는 의미로 통한다. – A nation’s fate hinges on the leadership of the president. - 한 나라의 운명은 대통령의 리더십에 달렸다. - 문설주에 문이 매달린다. 문설주가 대통령, 문이 국민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뭐? 국민이 문설주이니까 대통령이 문이라고?

 

이 글이 발표되고 일주일 후 1월 20일에 탄핵 논란을 뒤집어쓴 채 미 45대 대통령 트럼프의 임기가 종료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세계 각 나라의 리더들이 난국을 겪는 2021년을 감지한다. 그들 중 그 누구도 경첩이 떨어진 문짝처럼 국민에게서 덜커덩 떨어져 나가는 운명이 아니기를 기원한다.

 

© 서 량 2021.01.10

-- 뉴욕 중앙일보 2021년 1월 13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003587

 

[잠망경] 언힌지드

러셀 크로가 주연한 2020년 영화 ‘Unhinged’가 한국에서 번역 없이 그냥 ‘언힌지드’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것을 알았다. 영한사전은 ‘경첩을 뗀, 불안정한, 혼란한’이라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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