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77. 깊은 역할

서 량 2020. 11. 30. 11:05

 

비온(Wilfred Bion: 1897~1979)은 대상관계 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에 공헌한 영국 정신분석가로서 집단심리를 오래 연구한 결과로 정신과 영역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한 집단의 기능이 원만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을 ‘Basic Assumptions Group, 기본추정 그룹’이라 명명했다. 한 그룹의 소속인원들이 어른답게 성숙한 추정을 내리는 대신 어린애처럼 기본적인 추정만을 따른다는 뜻이다. 약칭으로 ‘베이직 그룹’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➀ 의존 그룹(Dependency Group) - 그룹멤버는 독자적 결정을 내리지 않고 그룹리더에게 의존한다. 리더는 부모 역할을 하면서 종종 신격화된다. 걸핏하면 상관에게 문의를 구하는 직장인도 마찬가지 경우. 상관이 사사건건 관여하고 싶어하는 기질이라면 의존성이 팽배한다. 상관은 자기의 권세를 신장하기 위하여 아랫사람의 성장을 막는다. 국가적 차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독재체제가 탄생한다. 의존심이 강한 사람들은 이른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형국이겠지만.

 

➁ 투쟁 혹은 도피 그룹(Fight or Flight Group) - 그룹멤버는 별것도 아닌 이유로 서로 철딱서니 없는 깡패들처럼 싸운다. 다툼을 꺼리는 평화주의자는 그런 환경에서 도망친다. 다치기 싫은 사람은 안전제일주의를 따른다. 그러나 대개 비겁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강력한 그룹리더는 외부의 적과 용감히 싸운다. 시시콜콜 내부에서 만만한 상대만 골라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며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➂ 짝 이루기 그룹(Pairing Group) - 동화에 등장하는 남녀, 왕자와 공주, 혹은 왕자와 신데렐라가 짝을 이루는 판타지와 상통한다. 모든 동화의 마지막은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하고 고즈넉하게 끝난다. 행복에의 염원이다. 그룹에서는 왕자와 공주 대신 지혜로운 두 멤버가 합세하여 새로운 아이디어가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영원한 희망에 목을 맨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노르웨이 심리학자 목스니스(Paul Moxnes: 1942~)는 비온의 베이직 그룹에서 그룹 멤버들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1998년 논문 타이틀이 이렇다. “그룹과 단체 속 판타지와 동화 – 비온의 기본적 추정과 깊은 역할” 여기서 ‘깊은 역할’은 ‘deep roles’를 직역한 것이다.

 

‘role’은 고대 불어에서 연극배우들의 대사가 적힌 두루마리(roll)를 뜻했다. 스펠링만 다르고 두 단어의 발음이 같다. 그룹리더는 배우나 다름없이 자기 역할을 맡는다.      

 

단체의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구성요원들이 맞는 역할, 다시 말해서 배역진을 여기에 소개한다. - 왕/神(King/God), 악마, 여왕, 마녀, 왕자, 희생양, 공주, 창녀, 노예, 불충한 노예, 현인, 사기꾼, 영웅, 패배자. – 정신적 질서가 망가지는 집단심리는 훌륭한 영화를 방불케 한다. 화룡점정 격으로 출현하는 광인(狂人)의 역할도 중차대하다.

 

2020년 12월 초에 비온의 베이직 그룹을 거론하며 쓴 목스니스의 그룹과 단체가 엮는 판타지와 동화에 대한 논문을 읽다가 미국과 한국의 정계 소식을 접한다. 두 국가의 현실 속에 깊이 뿌리내린 뭇 인물들의 역할을 살핀다. 이들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당신과 나의 어린이 동화 수순을 밟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새벽이다.

 

© 서 량 2020.12.01

-- 뉴욕 중앙일보 2020년 12월 2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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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깊은 역할

비온(WilfredBion: 1897~1979)은 대상관계 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에 공헌한 영국 정신분석가로서 집단심리를 오래 연구한 결과로 정신과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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