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74. 가을 햇살은 비스듬하다

서 량 2020. 10. 19. 09:04

 

초추의 양광이 뚜렷한 2020년 가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퇴근길 차창을 스치는 낙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소슬바람이 불어온다. 수목들의 잎새가 땅으로 떨어지는 일이 순조롭도록 도와 주기 위해서다. 가을바람에 우리의 슬픔이 숨어있다.

 

당신은 혹시 기억하는가. 옛날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시작 부분을.  –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 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비는 처량히 내리고…”

 

감상(感傷)에 빠지는 가을이다. 마음 놓고 슬픔을 곱씹어도 괜찮다. 슬픔은 어수선한 심사를 갈무리해준다. 하늘하늘 춤추며 흙을 향하여 추락하는 잎새의 몸짓을 보노라면 서글픈 심사가 엷어 진다. 감상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슬픔이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감상(鑑賞)하고 싶다, 가을을. 당신도 나도 단풍놀이를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난다. 형형색색으로 사람의 시선을 강탈하며 반짝이는 숲과 험준하고 아름다운 산악의 경치에 혼을 빼앗기기 위함이다. 가을은 예술이다. 음악이 아닌 미술품이다. 태아가 자궁 속에서 임신 16주에 빛을 감지하고 18주에 소리를 느낄 수 있듯이 인간은  단연 시각이 청각을 선행한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더니.

 

감상(感想)문을 가을에 대해 쓰는 건 어떨까. 안톤 슈낙도 슬픔에 대한 감상문을 쓰지 않았던가. 육이오가 끝난 1953년부터 1980년에 이르러 국정 교과서에서 사라질 때까지 근 30년을 우리 정서에 슬픔의 빗살무늬를 빚어내면서.

 

영어의 ‘appreciate’는 감상(鑑賞)한다는 뜻 외에 감사하고 고마워한다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그 뉘앙스를 십분 살리는 말이 우리말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감상이라는 말에는 대상을 평가한다는 뜻이 바닥에 깔려 있다. 노래자랑에서 딩동댕, 하며 누군가를 합격시키지만 열창에 전심하는 아마추어를 땡~ 하며 탈락시키는 심사위원의 엄중함이 대개 나를 슬프게 한다.

 

한 사람의 인격이 예술작품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억지스러운 생각이 나를 슬프게 한다. 사람은 살아 생전 누구든지 얼마든지 예술적인 면을 뽐낼 수 있겠지. 그러나 시간의 변수인 사람 자체는 결코 예술품이 될 수 없다. 예술품이란 눈에 눈동자가 없는 부동자세의 조각품처럼 무생물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지 않았는지.

 

사전은 ‘감상(鑑賞, 거울 감, 상줄 상)’을 ‘주로 예술작품을 이해하여 즐기고 평가하다’로 풀이한다. 영어에서도 ‘I appreciate…’ 다음에는 인칭대명사가 따르지 않는다. ‘Thank you!’에서는 꼭 따르지만.

 

당신은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즐거이 감상해도 그 음악을 향하여 노골적으로 고마워하는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감성 표현이 미흡한만큼 우리는 고마워하는 감정도 결핍돼 있다. 반대로 미국인들은 어떤 즐거운 평가가 나온 다음에야 고맙다고 말하는 계산성을 풍긴다. 이런 동서양의 말 습관 차이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안톤 슈낙이 세심하게 묘사한 “정원 한 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쏟아진 초가을 햇살은 비스듬한 각도였겠지 싶다. 작은 새의 가슴 깃털이 알게 모르게 흔들렸을 것이다. 그때와 다름없이 주홍색이 감도는 2020년 10월 중순 뉴욕의 햇살이 나를 소스라치게 슬프게 한다.

 

 

© 서 량 2020.10.18

-- 뉴욕 중앙일보 2020년 10월 21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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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가을 햇살은 비스듬하다

초추의 양광이 뚜렷한 2020년 가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퇴근길 차창을 스치는 낙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소슬바람이 불어온다. 수목들의 잎새가 땅으로 떨어지는 일이 순조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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