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의 마이클이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으로 입원중이다. 망상이나 환청증세 없이 간호사들을 희롱하고 성가시게 구는 말썽꾸러기다. 다른 병동에서 정신과의사를 두들겨 팬 후 그가 내 병동으로 후송온지 벌써 반 년이 넘었다.
아침 회진 시간에 그는 자기가 요즘 평소보다 더 이상해진 것 같다고 말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를 스쳐가는 바람에 잠을 설치고 다음날 정신집중이 안된다 한다. 밤에 공상(fantasy)을 심하게 하면 그럴 수 있다고 내가 설명하자 그는 활짝 웃으면서 셔츠를 훌렁 들어 올려 배를 보여준다. 모두 힐끗 그의 커다란 배꼽을 보았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 저는 원래 기분이 좋으면 남에게 배를 보여주는 습관이 있다고 답한다. 내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줬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고 덧붙이면서.
그가 방에서 나간 후 병동 심리학자가 자기 집 강아지도 기분이 좋으면 양탄자에 벌렁 누워 배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사회복지사 왈 자기네 고양이도 그렇다 한다. 사람도 좋아하는 상대에게 서로 대놓고 가슴과 배를 보여주는 상황이 있다면서 나는 화제의 폭을 넓힌다.
한의학의 음양설(陰陽說)에서 인체의 앞부분 배는 음경(陰經)이, 뒷부분 등은 양경(陽經)이 다스린다고 설정한다. 양이 강인하고 투박하다면 음은 약하고 섬세하다. ‘가슴과 엉덩이 사이 부위’라고 사전이 풀이하는 ‘배’! 그런 취약지역을 서슴없이 보여주는 태도는 두 생물체가 어지간히 상대를 좋아하고 신뢰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84년의 히트 영화 “The Karate Kid”를 다시 본다. 당신도 기억할지 몰라. 주인공 다니엘에게 가라테를 가르치는 미야기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을. -- “Karate here, karate here, karate never here!” 그는 처음에 양손으로 머리를, 이어서 가슴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를 가리킨다. 이 부분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 “정신은 머리 속에 있고, 가슴 속에 있지만 배 속에는 없다.”
내장으로 꽉 차 있는 당신과 내 배 속에 마음과 정신이 들어설 틈이 없다는 소견이다. 몸과 정신을 함양하는 무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뱃속을 차리는 행동을 삼가라고 미야기는 갈파한다. 그러나 ‘The way to a man’s heart is through his stomach -- 남자의 마음에 이르는 길은 그의 배를 통하는데 있다’라는 속담은 또 어떤가.
어릴 적 어머니가 “나는 네 배꼽에 유리창 붙였다” 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 윈도우를 통해서 어머니는 내 배 상태는 물론 정신까지 꿰뚫어 보셨다. 배와 정신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그런 배꼽을 마이클이 내게 보여준 것이다. 이름을 붙이지 못해 쩔쩔매는 자신의 정신세계에게 ‘fantasy, 공상’이라는 근사한 호칭이 생겼다는 기쁨에 넘쳐서 덜컥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미 그와 나는 정신치료에서 거론되는 ‘visceral communication, 내장(內藏) 소통(?)’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그가 정신과의사를 때렸던 사태를 회고하는 동안 그 의사의 오만한 행동에 대하여 내가 보인 공감의식이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이 말을 사전은 ‘본능적 의사소통’이라 풀이한다.
마이클과 나는 정신적으로 배가 맞았던 것이다.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의기투합을 뜻하는 ‘배가 맞았다’는 말과는 한결 다른 차원에서 쓰일 수 있는 소중한 개념이다. 유념하기 바란다.
© 서 량 2020.09.07
--- 뉴욕 중앙일보 2020년 9월 9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8639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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