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와 명국환의 '방랑시인 김삿갓'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 시절 음질이 좋지 않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한 가요가 떠오른다. 가수 이름과 노래 제목은 생각나지 않고 가사와 멜로디만 생생하다. 아무리 뒤져봐도 인터넷에 뜨지 않는 그 노래 가사가 이렇다.
당신의 이름을 나는 알고 싶소/ 그리고 내 이름도 아르켜 드리리다/ 우리가 서로서로 이름을 앎으로써/ 오늘의 사랑을 맺을 수 있고/ 그리고 내일도/ 기약할 수 있지 않소
여가수는 남녀가 하는 사랑의 전제조건으로 통성명을 내세운다. 그 절차에 착수하는 세레나데를 부른다. 남자가 작업을 걸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여자 쪽에서 “What’s your name?” 하고 물어보는 정황! 에덴의 동산에서 금단의 열매에 대뜸 손을 댔던 이브처럼 그녀는 남자의 정체성을 먼저 타진해보고 싶은 것이다.
서로 이름을 모르는 남녀가 말을 주고받는 것은 서명하지 않은 수표처럼 유효하지 않다고 그녀는 넌지시 암시한다. 전기회사 직원이 초인종을 눌렀을 때 신원을 분명히 확인한 후 집에 발을 들여놓게 하는 안전체크가 필요한 것이다.
빅토르 유고의 ‘레미제라블’에서 프랑스 혁명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첫눈에 서로 반해버린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처음 만난 그날로 격렬한 사랑을 한다. 코제트는 사랑이 끝나고 나서야 사내의 맨어깨에 머리를 올려 놓고 그의 이름을 물어본다.
그들은 통성명 없이 통정을 했다. 서로의 이름을 정중히 알려주는 수순을 깡그리 무시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뛰어드는 사람이나 발버둥을 치며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은 상대방 이름을 물어본 후에 행동하지 않는다.
그 노래는 형식위주의 인간관계를 역설한 것이다. 한국의 일일 드라마에 나오는 남녀관계도 비슷한 절차에 하이라이트를 두는 것이 아닌가 한다. 상대방 가족의 배경이나 재정상태 같은 세속적 조건을 살피는 역할에 많은 탤런트들이 전념하는 모양새다. 남녀의 터무니없는 사랑과 현실적 여건이 충돌을 일으키고 갈등이 빚어진다.
정신과 진단명이 환자치료에 걸림돌이 되는 경험을 번번이 한다. 정신질환명, 즉 ‘이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환자에게, “당신의 병명을 나는 알고 싶소~♪” 하며 노래하는 심리상태가 아니다. 많은 정신과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대신 병명을 치료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대체로 진단명은 환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It is far more important to know what kind of person has the disease than what kind of disease the person has. -- 어떤 사람이 병을 가졌는지를 아는 것이 어떤 병을 그 사람이 가졌는지를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 이름도 병명도 모종의 정체성을 띤다. 정체성에는 기존 컨셉과 편견이 따를 때가 많다. 정신과 진단명을 생각하는 순간에 환자의 생생한 실태는 사라지고 증후군이라는 공허한 추상명사가 등장한다.
그 여가수 이름을 알고 싶다. 작곡자 이름과 악보를 찾아내서 그 노래를 제대로 확실하게 부르고 싶다. 곡을 틀때마다 시계 태엽을 감듯 손잡이를 돌리면 기적처럼 유성기(留聲機)에서 흘러나오던, “나 혼자 만이~♪” 하는 송민도의 '나 하나의 사랑'을 듣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보다 더 순수했던 그 세상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 서 량 2020.09.20
-- 뉴욕 중앙일보 2020년 9월 23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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