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마치도 화학반응 같아. 그들이 우리를 변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을 변하게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달라진 상태에서 남들과 또 색다른 반응을 일으키는 거지. 그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Rust Creek’이라는 공포 영화에 나오는 말이다. 2019년 1월에 미국에서 개봉된 후 한국에도 ‘러스트크릭’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공포영화다. 러스트크릭은 산림이 우거진 켄터키 주 어느 음산한 작은 마을 이름. 위의 대사는 그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동네 불한당들에게 차를 뺏긴 뒤 사생결단으로 쫓겨 다니는 여자 주인공에게 숲속에서 혼자 사는 사내가 하는 말이다. 그는 양잿물과 성냥 따위를 섞어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가내공업으로 마약을 제조하는 아주 이상한 놈이다.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나와 환자 사이에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난다는 생각에 매달린다. 어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좋고 나쁨을 표현할 때 ‘chemistry’가 좋다, 나쁘다 하는 식의 관용어가 18세기에 생겨났고 나도 그 사고방식에 흠뻑 물들어 있다.
지금은 정신질환의 요인을 대부분 ‘chemical imbalance (화학적 불균형)’라 부르는 시대다. 얼마 전 한 환자 아버지에게 내가 담당 정신과 의사라고 소개를 하니까, “Oh, you are the CHEMISTRY MAN!”이라 그가 말하길래 “No, I am not a chemistry man. I am a MENTAL MAN!” 하며 응수한 적이 있다. 그의 말에는 정신과 의사를 향한 야유가 섞여 있었고, 나는 그가 대변하는 시대사조에 비꼬듯이 항의를 제출한 셈이었다.
의사들이 환자들의 말을 귀담아듣는 데는 환자의 증상에 대한 관심 외에 또 다른 내막이 있다. 그것은 즉 도움을 받는 사람과 도움을 주는 사람의 관계가 서로 시작되는 본능적인 자세인 것이다. 이 때 빚어지는 그들의 관계는 각자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 유아기의 기억을 부지불식간 일깨운다. 그것은 세심하고 사랑스러운 보살핌으로 어린애의 성장에 도움을 주던 엄마와, 생존을 위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을 받던 가여운 어린애와의 관계가 고스란히 재현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영화 속 외로운 마약제조자의 말마따나 이 화학반응은 가역반응(可逆反應)이라는 점에 당신은 주의를 집중하기 바란다. 환자와 세션을 하는 중 내가 환자에게 일으키는 반응과 환자가 내게 일으키는 반응이 부산스럽게 쌍방통행을 하는 정황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순간순간 내가 환자로 돌변하고 마찬가지로 환자가 나로 돌변하는 가역반응의 혼동과 절박감에 당신도 한 번 푹 빠져보라.
나와 환자와의 다른 점이 있다면 세션이 끝난 후 나는 내 정체성을 쉽사리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이 좀 있을 뿐! 환자도 나와의 화학반응이 끝나면 다시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간다. 그런 일이 무수히 반복되면서 이루어지는 관계 속에서 환자도 변하고 성숙하고 나도 변하고 성숙한다. 그도 나도 차후에 다른 의사와 다른 환자와의 관계형성에서 또 색다른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그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관계(關係)’라는 단어는 사실 어려운 한자어다. 옥편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하게 “①둘 이상이 서로 걸림 ②서로 관련이 있음 ③남녀의 성교”라 풀이하지만 ‘관계할 관’은 제켜 놓더라도 ‘맬 계’에는 묶고 매달리고 속박한다는 뉘앙스가 넘쳐흐른다. 관계를 맺는 것은 속박당한다 일이다. 영어의 ‘relationship’에도 남녀가 사귄다는 의미가 포함되지만 ③번처럼 노골적으로 성적(性的)인 뜻이 없는 것이 참 이상하다. 알고 보면 서구인보다 더 뻔뻔한 중국인들이 아닌가 싶다.
© 서 량 2019.04.07
--- 뉴욕 중앙일보 2019년 4월 10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7135723
'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컬럼| 369. 나는 없다 (0) | 2020.08.10 |
---|---|
|컬럼| 368. Medicine Man (0) | 2020.07.27 |
|컬럼| 238. X 같거나 X만하거나 (0) | 2020.07.22 |
|컬럼| 234. 감나무 밑에 누워서 (0) | 2020.07.18 |
|컬럼| 367. 개 (0) | 2020.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