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 입원환자 중에 젊었을 때 빌딩 옥상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져서 심한 두뇌손상을 받은 50대 중반 백인이 있다. 그는 나를 꼭 “닥터 오”라고 잘못 부른다. 내 이름을 아무리 바로잡아줘도 다시 그렇게 부른다.
모든 생명체에게 반복학습이 효과가 있다는 원칙을 굳게 신봉하는 나는 그를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김없이 나를 닥터 오라고 틀리게 호칭하는 그 놈이나 그걸 매번 지적하는 나나 서로 고집이 막상막하다. 따지고 보면 둘 다 똥고집이다.
고집(固執)은 사전에 ‘자기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팀. 또는 그렇게 버티는 성미’라고 나와있다. 영어로는 ‘stubbornness’라 하는데 이 단어를 다시 영한사전에서 찾아보니까 똥고집, 외고집, 옹고집 등으로 나와있다. 그러니까 ‘막을 옹’자가 들어가는 옹고집(壅固執)은 앞뒤가 꽉 막히고, 생각이 뻣뻣하고, 자기 의견만 잡고 늘어지는 성미,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 발음도 비슷하지만 옹고집보다 똥고집이 더 호소력 있게 들린다. 내 귀에는.
똥고집은 성격장애다. 현실성이 매우 부실하거나 앞뒤 이론이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주면서도 끝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은 응당 정신과치료를 받아야한다. 요즘 한국의 몇몇 정치인들이 대단한 똥고집을 부리고 있다. 이런 성격장애자들은 두뇌손상 증상을 보이는 내 환자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부류다.
약간의 고집이나 아집은 자신의 자존감과 안존을 위한 심리적 방어체제다. 자존심의 손상이나 생존의 불이익을 마다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 하는 사람은 용기 있고 사려 깊고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존경한다.
일견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학문이나 예술에 심취한 사람들이 시사하는 집착과 애착심은 모름지기 바람직한 인간의 집념이며 정열이면서 참으로 피눈물나는 노력의 결과다. 인류에 공헌한 뛰어난 학자나 예술가들이 다 그렇다. 토마스 에디슨이 말했던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stubborn’은 고대영어 ‘stub, (나무)그루터기, (잘라진)토막, (담배)꽁초’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그보다 훨씬 전에 ‘stub’는 전인도유럽어로 밀거나, 찌르거나, 때린다는 거칠고 사나운 의미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st~’로 시작하는 영어는 거칠고 사나운 뜻이 많다. ‘stubborn’은 물론, ‘strong, 강한’ ‘stick, 막대기’ ‘stone, 돌’ ‘stab, (칼로) 찌르다’ ‘stiletto, 단도, 뾰족구두의 발굽 (드물게는 흉기로 쓰임)’ ‘stench, 악취’ 기타 등등 그 예가 부지기수다. ‘steel, 강철’ ‘stamina, 스타미나(남자의 체력), ‘stability, 안정(安定)’처럼 좀 괜찮게 들리는 단어도 있기는 하지만, 언어학적 차원에서 강한 것은 무서운 것이다. 당신과 나는 강한 것을 싫어하고 꺼려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있지. 우리는 대변(大便) 속에 무서운 식중독을 일으키는 대장균이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본능으로 알아차린다. 결국 우리는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다. 영어 하는 의사들이 ‘shit, 똥’이라는 속어 대신 점잖게 입에 올리는 ‘stool, 대변’도 ‘st~’로 시작하지 않는가.
내가 가끔 이렇다. 두뇌손상 때문에 발생한 한 환자의 똥고집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똥 이야기로 끝나서 당신에게 미안하다.
© 서 량 2019.11.03
--- 뉴욕 중앙일보 2019년 11월 6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7750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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