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35. 스크린 메모리

서 량 2019. 4. 22. 06:16

우리는 지난 날을 얘기한다. 어릴 적 기억을 불현듯이 떠올리거나 아침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퇴근길 주차장에서 직장 동료와 말을 나누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사조와 사회풍조와 가정환경의 테두리 안에서 심리적으로 발육한다. 그렇게 지난 날을 벗어난 듯한 환자들이 내게 과거를 털어 놓는다. 그들의 현재가 과거에 받은 상처의 결과라는 생각의 덫에 걸려서 나는 한 사람의 유전적 요인보다 그가 겪은 인생경험에 더 큰 관심을 쏟는다.

 

프로이트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한다는 원칙을 정신분석의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현재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는 이론에는 어딘지 아리송한 구석이 있다. 나는 현재가 과거의 금단 없는 연속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할 때가 많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 속담은 그토록 긴 세월을 한 사람의 버릇이 변함없이 지속된다는 뜻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세 살 때쯤 체험했던 스트레스가 여든 살 노인네 정신상태의 원인이 된다고?

 

아내에 대한 나쁜 소문 때문에 프랑스 귀족과 결투 끝에 총상으로 죽은 러시아 시인 푸슈킨(1799~1837)의 유명한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그리고 지나간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로 끝난다. 그는 과거가 아름답다고 선포한다.

 

우리의 기억은 현재라는 색안경을 쓰고 과거를 진술한다. 나는 환자가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억할 때 그날그날의 기분상태에 따라 다르게 묘사하는 장면을 숱하게 목격해 왔다. 

 

같은 사건을 두고 장대비가 죽죽 쏟아지는 오후에 언급하는 내 얼굴 표정과, 청명한 아침에 얘기를 꺼내는 내 태도가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깊이 인지한다. 과거가 객관이 아니라 주관이라면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과거는 어디에도 없다. 현재가 과거를 창조하는 것은 아닐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포크너(1897~1962)가 남긴 소름 돋는 명언이 있다.  --- The past is never dead. It’s not even past. ---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과거는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는다. --- 그렇다. 우리는 늘 과거와 공생(共生)한다. 

 

프로이트는 ‘스크린 메모리(screen memory)’에 대하여 우리를 가르친다. 어린애가 충격적인 경험을 한 뒤 사실에서 약간 동떨어진 감각을 기억하는 메커니즘이다. 어떤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는 대신에 시각적(visual) 이미지를 간직하는 것이다. 스스로 아픈 마음을 경감시키는 방어책이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 심하게 손찌검을 받은 아기가 어른이 된 후 왠지 어머니의 하얀 손이 눈에 밟힌다던 환자를 본 적이 있다. 유아기에 받은 성적(性的) 충격도 이런 식으로 남기를 잘한다. 

 

티 에스 엘리엇(1888~1965)의 시, ‘Burnt Norton, 불타버린 노턴 맨션’의 일부분을 소개한다.

 

가라, 가라, 가라, 새가 말했다. 인간은 / 현실을 잘 견디지 못한다. / 지난 시간과 미래의 시간 / 있었을 듯한 일과 있었던 일들이 / 늘 현존하는 하나의 종말을 가리키는데 (필자 譯)

 

그는 시의 시작에서 현재와 과거가 미래 속에 존재하고 미래는 과거에 담겨 있다고 유추한다. 되찾을 수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약간 생소한 모습으로 변한 당신의 과거가 스크린 메모리에 아름답게 남는다. 그런 과거만이 우리의 현존이다.

 

© 서 량 2019.04.21

--- 뉴욕 중앙일보 2019년 4월 24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7178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