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33. 왜 난동이 일어날까

서 량 2019. 3. 26. 08:39

 

내가 일하는 정신병원은 병원 전체가 폐쇄병동이다. 환자들이 다른 병원을 여러 군데 전전하다가 후송돼 오는 곳이기 때문에 증상이 호전되는 것이 어렵고 오래 걸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확성기를 통하여 ‘코드 그린’이 전 병원에 울려 퍼진다. 직원들이 비상사태가 터진 병동으로 뛰어간다. 한 환자가 난동을 피운 결과가 코드 그린의 원인이 된다.

 

그린, 초록은 성장의 상징이니까 환자들이 정신적 성장을 위하여 난동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나는 자주한다. 어릴 적 길거리에서 내 또래 코흘리개 어린애들이 치고 박는 싸움이 나면 동네 어른들이 “싸워야 키 큰다”며 소리치며 애들 몸싸움을 선동하던 기억이 난다.

 

‘agitation, 난동’에 대하여 환자들과 토론했다. 난동을 피우는 환자는 병동직원이나 다른 환자를 사소한 이유로 폭행하는 수가 많다. 남을 해코지하지 않는 경우에 자살소동을 일으키거나 심한 자해(自害)도 불사한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코드 그린이 걸린다.

 

사람은 왜 가끔씩 육체적으로 난동을 피우느냐, 하는 질문을 던진다. 한 환자 왈, 자기가 그러면 여러 직원이 덤벼들어 엉덩이에 주사를 아프게 놓기 때문에 절대로 난동을 피우지 않는다며 자기 방어적 반응을 보인다.

 

‘agitation’은 영한사전에 불안, 동요라 나와있고 정치적 시위나 사회적 선동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사전은 난동(亂動)이라는 개념을 언급하지 않는다. 매일 영어를 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감지하는 격렬한 뉘앙스가 없이 점잖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왜 그럴까. 한국인들 뼛속 깊이 연연세세 내재해 온 ‘평화’에 대한 지극한 갈망 때문일까.

 

‘agitation’은 16세기 불어의 ‘토론하다’와 라틴어의 ‘움직이다’와 말의 뿌리가 같다. 프랑스 사람은 말로 토론하고 이태리 사람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 ‘agitation’이었다. 자국어의 중요성 때문에 한때 ‘언어 경찰’까지 있었다고 소문이 난 불란서 사람들과 손을 심하게 흔들며 대화하는 이태리 사람들의 특징적인 차이점을 전 세계가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agitation’은 나중에 ‘정신적 동요’라는 의미로 변했고 19세기 초에는 ‘정치적 선동’이라는 뜻이 가미됐다. 요사이는 ‘난동’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나는 이쯤 해서 언어학을 제켜 놓고 인류 집단의식의 변천사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선동이 난동이라는 뜻으로 변했다면 그 다음에 무슨 뜻이 생겨날까.

 

1971년에 이태리계 미국인들 사이에 생긴 ‘agita’라는 속어가 있다. 피자 냄새가 물씬 묻어나는 이 슬랭은 요즘 거의 표준어가 돼서 ‘agitation’이라는 뜻으로 통하고 있다.

 

‘agita’는 이태리어의 ‘acido’(acid, 酸)에서 유래했다. 위산과다증, 우리말로 생목, 속 쓰림을 뜻하던 ‘acido’가 ‘agita’로 변했다가 ‘agitation’이라는 의미가 됐다. 이때도 이탈리안 스타일은 속 쓰림이라는 육체적 장애가 불안, 동요 같은 정신적 증상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agitation’에 관한 토론은 나중에 약간 삼천포로 빠졌던 것 같다. 한 환자 왈, 자기는 환청증상이 있어 왔는데 별세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기를 병동에서 자꾸 난동을 부리면 병이 빨리 나아서 남들보다 먼저 퇴원하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2019년 봄에 한국은 불안, 동요, 선동에 젖어 있다. 이러다 난동이 일어나서 코드 그린이 터지면 안된다, 하는 강박증이 싹튼다. 그 환자 말마따나 심리적 난동이 거듭되면 작금의 증상이 퇴원할 것인가, 하는 괴상한 질문을 던지면서 출근한다. “싸워야 키 큰다” 하던 옛날 어른들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듯하다.

 

© 서 량 2019.04.07 

--- 뉴욕 중앙일보 2019년 4월 10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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