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37. 우리 나라 좋은 나라

서 량 2019. 5. 20. 11:10

친구와 이메일을 주고받던 중 “적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이 우연히 튀어나왔다.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싶어서 검색을 했더니 만화가 월트 켈리(Walt Kelly, 1913~1973)가 포고(Pogo)라는 만화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 한 말이란다. 포고는 이렇게 말한다. -- “We have met the enemy and he is us.” (우리는 적을 만났는데 적은 우리다.)

 

enemy’의 말뿌리에는 9세기경 고대 불어로 적 말고도 ‘악마’라는 뜻이 있었고 라틴어로 ‘친구가 아닌 사람’, 즉 ‘낯선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13세기의 영어권에서는 이 단어는 비기독교인을 지칭했다. 14세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전쟁 상대의 적군(敵軍)이라는 무시무시한 의미가 생겨났다.

 

여자 이름 ‘Amy’에는 ‘enemy’의 끝 부분에 친절하다는 뜻의 ‘emy’가 그대로 남아있다. ‘enemy’의 시작 부분 ‘en‘은 현대영어로’un~’이라는 부정적 의미. 결국 ‘en-emy’는 ‘un-kind’, 즉 ‘불친절’ 하다는 뜻이다. 단순히 말해서, 불친절한 사람이 곧 적이다. 참고로, ‘amiable’은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고 상냥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하며 노래를 부르던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우리 나라’는 좋은 나라이고 ‘남의 나라’는 나쁜 나라라는 사고방식에 젖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 아주 자연스럽게 극단적 흑백논리에 젖었었고 지금 이 나이에도 곧잘 흑백논리를 펼치며 살아간다.

 

흑백논리는 투표를 할 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민주주의적 절차다. 서로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두 후보자 중에서 한쪽에 표를 던지는 마음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 둘 다 찍으면 내 표는 무효다. 결혼 상대는 물론이고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이분법적 절차를 끊임없이 밟는다. 우리 삶의 매 순간순간이 양자택일의 연속이다.

 

‘우리’의 ‘우’를 발음을 할 때 당신은 입을 오므린다. 입 주변의 괄약근이 그렇게 수축되는 순간에 원형(圓形)의 입술 모양이 보여주는 한계성(限界性)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테두리, 울타리, 소쿠리, 돼지우리처럼 ‘우’ 발음이 시사하는 경계성(境界性)을 알아차리기 바란다. 영어에서도 ‘we’ 할 때의 처음 ‘우’ 소리 roommoonhoop(굴렁쇠) 같은 단어가 보여주는 테두리또는 sense of boundary, 경계 의식’을 보여준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라는 개념은 수 많은 ‘나’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 개개인을 비호해 주는 것이다세포도 세포막이라는 테두리가 파손되면 금방 죽는다.

 

정신분석가 비온(Bion, 1897~1979)은 한 집단이 일으키는 심리기전 중, 외부의 적과 싸우는 동안 내부 분열이 없어지고 결속감이 생기는 현상을 ‘fight or flight’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 우리라는 개념은 공동의 적을 전제로 한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와 남 사이에 바운더리(boundary)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 사이에 바운더리가 없어지면서 한쪽의 정체성(identity)이 소멸되는 문제가 터진다. 정체성 상실은 정신과에서 가장 치료하기 힘든 증상으로서 스스로의 특질이 삭제되는 현상이다.

 

우리 나라 나쁜 나라, 남의 나라 좋은 나라, 하면서 자신의 이념과 원칙을 스스로 상실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나라가 끝내는  ‘amiable’하게, 사근사근하고 상냥하게 정체성을 포기할 것으로 보인다.

 

© 서 량 2019.05.20

--- 뉴욕 중앙일보 2019년 5월 22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