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36. 독백에서 출발하여

서 량 2019. 5. 6. 08:07

그룹세션을 하다가 환자들에게 물었다우리는 왜 남에게 말을 거는가누군가 의사소통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우리가 추구하는 소통의 밑바닥에는 무슨 이유가 깔려 있는가하며 내가 다음 질문을 던지기가 무섭게 제발 자꾸 물어보지 말라고 누가 짜증을 부린다.

 

한쪽이 다른 쪽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으라고 있는 것이 생각이다질문도 마찬가지수요와 공급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도 생각이나 질문처럼 상인과 소비자의 주고받음이 활발해야 경제유통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지정부가 국민에게 무상으로 부()를 배급한다고 해서 그 나라의 경제지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논리의 비약이 심하지만 정작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속내를 남에게 털어놓고 싶어한다때로는 바빠 죽겠는 사람을 붙들고 일방적으로 오래 떠드는 사람을 대하기도 하지만그러나 당신은 타인의 감성을 너그러이 감싸주는 상대에게 마음에 쌓이고 맺혔던 생각과 느낌을 쏟아내면 속이 후련해진다그리고 십년 묵은 체증이 풀렸다고 웃으며 말한다.

 

한 환자가 느닷없이 노래를 부른다지금 네가 하는 노래도 우리가 하는 대화의 일부이니까 가사를 분명히 알려 줄 수 있겠느냐 하니까 그건 자기만이 아는 노래이니까 싫다고 한다.

 

우리의 대화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정확한 발음으로 중얼대는 그런 독백(獨白)이 들어있다혼잣말은 대화가 아니라고 눈썹을 찡그리며 당신은 대들고 싶겠지나는 이렇게 심각하게 말한다. -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 또한 내가 하는 혼잣말이다시인(詩人)을 위시로 한 모든 글쟁이들은 자신들의 독백을 읽고 공감하는 독자들이 상주하는 거대한 가상의 광장으로 날이면 날마다 시도 때도 없이 출두한다.

 

monologue, 독백’은 mono, 하나()’라는 접두어가 밝히듯이 혼잣말을 뜻한다반면에 dialogue, 대화’의 첫 부분 dia-(across, 가로질러건너서맞은편에)라는 의미로서 말하는 사람의 머릿수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dialogue’는 딱히 둘이서 주고받는 말 외에도 여러 명이 말을 주고받는 그림이기도 하다.

 

무대 연극이나 영화에서 가끔 쓰이는 방백(傍白)이라는 화법이 있다이것은 한 등장인물이 말을 하지만 다른 인물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경우다정신과 냄새를 풍기면서 자기 일을 남의 일처럼 쿨하게 말하는 기법.

 

고백독백방백 같은 한자어는 다 ‘흰 백()’으로 끝난다내 어릴 적 한식집 대문에 ‘맹견주의’ 바로 밑에 쓰인 ‘주인 백’도 지금 알고 보니 흰 백자다옥편에 ’은 많은 뜻이 나와있는데 그 중 ‘아뢰다말씀드리다사뢰다’는 대목도 있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지중국식 독백은 혼자 중얼거리는 어법이 아니라 누구에게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굳이 전달하는 행위다그렇게 마음을 털고 비워버리면 영혼이 백지처럼 하얗게 깨끗해지는 모양이지.   

 

그날 그룹세션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그러나 세션이 끝난 후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속으로 이런 독백을 한 것 같다우리가 남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자신의 심리적 체증을 풀거나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허전한 자기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남의 마음을 입수하려는 시도가 아닐지.


© 서 량 2019.05.06

--- 뉴욕 중앙일보 2019 5 8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