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95. 말없음에 대한 정신분석

서 량 2017. 9. 18. 12:23

의사와 환자의 의사소통에 대하여 생각한다. 혼란스러운 마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한 사람과 정신과의사라는 다른 한 사람 사이에 의사전달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대화를 나눌 때 환자건 의사건 서로 언급을 하는 사항보다 언급을 하지 않는 사항이 더 많다는 사실도 이상하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소통과 불통에 적용된다. 사실 우리는 말하기(有言)보다 말없기(無言) 쪽으로 더 관심을 쏟아야 할 때가 많다. 나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카테고리로 침묵의 의미를 분류한다.

 

1. 마음이 편해서 말이 없기

흔쾌한 휴식이 진행되는 상황이다. 에너지의 재충전. 음악회 중반부에 삽입된 인터미션의 효능이랄 수도 있겠다. 감칠맛 나는 섹스를 끝낸 원기 왕성한 남녀가 서로에게서 잠시 떨어져 제각각 말없이 누워있는 평온함을 정신분석가 위니컷(Winnicott)은 슬쩍 지적한다.

 

2. 말 문이 막혀서 말이 없기

'꿀 먹은 벙어리'라는 관용어를 생각해 보라. 전혀 휴식이라 치부할 수가 없다. 이때 벙어리는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싶겠는가. 표현능력이 부재하는 정경이 안타깝다. 너무나 놀랐거나 기쁜 나머지 일순간 말문이 막혀서 잠시 실어증(失語症)에 빠지는 현상도 이 부문이다.

 

3.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말이 없기

좌절감 때문에 일부러 말하기를 포기한 마음가짐. 그야말로 고요한 체념의 안도감이 전신을 엄습하는 순간이다. 가장 세련된 언어 기법으로 아테네 집권층의 무식함을 폭로한 불경죄 때문에 기원 전 399년에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마시기로 결심했던 경지도 그랬을 것이다.

 

4. 상대를 괴롭히기 위해서 말이 없기

이쯤 되면 대화라기보다 언쟁(言爭)이라 보는 것이 마땅하다. 부부싸움이 터졌을 때 말끝에 상대방에게 무슨 빌미를 제공하기가 싫어서, 혹은 어떤 사실을 인정하면 상대방이 의기양양해지는 꼴이 역겨워서 입을 다무는 예가 좋은 예다.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취하는 언어적 입장이나 자세라는 뜻으로 최근 한국 신문기자들이 자주 쓰는 유행어 '스탠스(stance)'도 이것이다. 이런 침묵은 거의 고의적이면서 옹졸하고 악랄하다.

 

이 외에도 모든 생명현상이 원래 타고난 원초적인 말없음도 있다. 우리 모두가 유아기에 체험했고 지금도 부단히 지속되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세심한 심리적 성숙과정이다.

 

우리의 의식형성 단계 초창기에는 오직 주관만이 존재했다. 세상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원시적 욕구 충족으로 버무리 된 판타지였다. 그 판타지는 우리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창조물이었고 꿈이 우리에게 부여된 객관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창조한 예술작품인 것과도 같다.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언(無言)의 세계이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그것은 또 천체의 음악처럼 절대적으로 사적(私的)이라고 위니컷은 해명한다. 인터넷 사이트의 영입을 위한 비밀번호처럼 타인의 접근 금지구역이다. 위니컷은 또한 동물에게 잡아 먹히거나 강간을 당할지언정 절대로 그 금기를 깨지 않으려는 우리의 심성을 절실히 묘사한다.

 

14세기 말에 생겨난 'communication (의사소통, 의사전달)'은 고대불어와 라틴어의 'common (공동, 공통)'는 물론이고 기원 전 4,5천년 경의 전인도 유럽어에서도 같은 말의 뿌리가 발견된다. 의사 전달은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의사와 환자간에 말 없이 소통이 일어나다니. 어떻게 침묵이 이해의 도구가 되는가. 따스한 봄날 고양이가 강아지의 마음을 알아채는 사태가 이루어지는가. 이 엄청난 질문의 해답을 얻기 위하여 내가 밟는 침묵의 예식(禮式)은 위의 여러 카테고리 중 어떤 것인가.

 

© 서 량 2017.09.17

-- 뉴욕중앙일보 2017년 9월 20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