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2일에 미국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노예제도를 수호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기로 한 결정 때문에 보수주의자 파와 반대파가 거리에서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트럼프는 극우파를 크게 규탄하지 않았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며칠 후 백인우월주의를 꼬집는 발언을 했지만 뒤늦은 반응이라는 지적이다. 이쯤 해서 화제는 인종차별과 편견과 증오심이 아니라 트럼프가 대단히 나쁜 대통령이라는 식으로 초점이 바뀐다.
'identity politics (정체성 정치)'라는 말을 이 뉴스와 연관해서 한 해설자가 티브이에서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
정신과에서 정체성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정체성은 동일하게 지속되는 자신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일컫는다. 동일성(sameness)과 지속성(continuity)이 없는 체험은 잘못된 정체성이다. 'identity'는 중세 라틴어와 불어에서 명실공히 같다는 의미였다. 한 개인의 정체성이 정상적인 성장과정과 여건을 요구함은 물론이다.
정신분석 용어로 쓰이는 'identification', '동일시(同一視)'는 좋아하거나 숭배하는 사람과 자기 자신의 공통점을 부각시키면서 그 사람을 닮아가는 메커니즘을 뜻한다. 우리들끼리 말이지만 좋은 정신상담은 뛰어난 상담기술보다는 정신과의사의 좋은 사람됨됨이에서 힘을 입는 것이 태반이다.
'identification'은 정신과를 떠나서 일상어로 '신분증'이라는 뜻이다. 신분증에 명시된 인적사항은 수시로 신원을 위조하는 범죄자나 스파이가 아닌 이상 항구여일 지속적으로 동일하다. 이것은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정체성은 한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 이를테면 그룹이나 정당, 그리고 국가나 인종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정체성은 미국사회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이민사회의 소수민족들이 저마다 정체성을 피력하면서 정치적세력을 면면히 확장시켜 온 것이다. 미국의 역사는 '소수의 정체성 (minority identity)'을 다수가 격려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점철한다.
지난 대선 때 힐러리 클린턴이 여성, 흑인, 히스패닉, 성적소수자 같은 정체성 정치에 매달리는 동안 도날드 트럼프는 긴 세월을 마이너리티 계급투쟁 때문에 각광을 받지 못한 빈곤층 다수의 백인들 표를 제대로 획득했던 것이다. 요사이 티브이에서 미국 민주당이 더 이상 정체성 정치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해설을 곧잘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컬럼비아 대학 역사학 교수 마크 릴라(Mark Lilla: 1956~)는 2016년 11월 18일 뉴욕 타임스 선데이 리뷰에 발표한 "The End of Identity Liberalism (정체성 진보주의의 종말)"에서 이렇게 설파한다.
... Identity politics, by contrast, is largely expressive, not persuasive... We need a post-identity liberalism, and it should draw from the past successes of pre-identity liberalism... (To paraphrase Bernie Sanders, America is sick and tired of hearing about liberals’ damn bathrooms.) ... 이에 비해 정체성 정치는 표현만 일삼을 뿐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지난 전기(前期) 정체성 진보주의에서 성공리에 뽑아낸 후기(後期) 정체성 진보주의를 원한다... (버니 샌더스의 말을 달리 하자면 미국은 진보주의자들의 우라질 놈의 화장실 얘기에 진절머리를 치고 있다.)
© 서 량 2017.08.21
-- 뉴욕중앙일보 2017년 8월 23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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