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94. 바운더리(Boundary)

서 량 2017. 9. 4. 15:09

숲이 울창한 아프리카 초원에서 숫사자가 갈기를 휘날리며 소변을 깔김으로 자기의 영역을 표시해 두는 장면을 당신은 눈여겨 본적이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를 지표 삼아 다른 수컷들로부터 자신과 가족의 생존공간을 지키려는 그들의 본능을 실감해 본적이 있는가.

 

동물왕국에 속하는 우리는 사자, 호랑이, 곰 혹은 멋모르는 수캐처럼 시시때때로 자신을 에워싸는 경계선을 인지한다. 이제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의 첨단을 걷는 당신과 나는 옆집과의 경계선에 애써 방뇨를 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예쁜 페인트를 칠한 담과 울타리를 유지한다.

 

비 내리는 주말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긴장한다. 우리는 비즈니스로 집을 방문한 보험회사원을 내실(內室) 쪽으로 초빙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警戒)하고 마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경계의식(境界意識)은 동물학에서 대체로 동종(同種) 사이에서 생기는 현상으로 본다. 물론 당신이 어느 날 집안에서 쥐를 본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앞마당에 나비 한 마리가 하늘하늘 날아든다고 해서 불안한 심정이 되지는 않는다. 숫사자가 꺼리는 동물이 숫사자이듯 사람이 느끼는 공포의 대상은 바로 사람이다.

 

집에 해당되는 영역을 동물학에서 'home range, 행동권(行動圈)'이라 부른다. 행동권 안에 보험회사원이 발을 디딜 수는 있겠다. 그러나 집주인의 침실 같은 'core area, 핵심영역(核心領域)'에는 결코 진입할 수 없다. 동종의 동물끼리는 적당한 선에서 서로가 서로를 피할 줄 아는 본능적 기본자세를 지킨다.

 

'body boundary, 신체경계(身體境界)'는 주택공간보다 훨씬 더 미묘한 문제점을 지닌다. 동물이건 사람이건 어미와 새끼 사이에서는 신체영역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녀간 신체적 공간에는 흉허물이 없다. 건강한 사랑은 상대의 핵심영역을 침범하고 싶어한다.

 

번잡한 맨해튼 거리나 비좁은 슈퍼마켓 통로에서 자칫 남과 몸이나 카트가 부딪히면 본능처럼 "Excuse me!" 하고 외치는 우리들이다. 급하게 차선을 바꿀 때 경적을 빵! 울리는 뒤차도 그렇지만 우리는 남의 공간을 침범하려는 순간 강한 경고를 받는다.

 

'psychological boundary issues, 심리적 영역문제'처럼 복잡한 문제가 또 있을까. 당신의 지인들 중에 습관적으로 남의 사생활에 참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오랜 만에 대하는 친척들이 직장을 구했느냐, 여자친구가 생겼느냐, 하는 따분한 일들을 정면으로 물어보는 상황이 지겹고 힘들어서 명절날 고향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의 서글픈 사연을 자주 듣는다. 장기 훈수는 뺨 맞아 가면서 한다는 우리 속담도 나를 슬프게 한다.

 

'boundary, 영역, 경계, 테두리'의 뿌리말 'bound'는 라틴어와 고대불어에서 쓰이기 시작했다가 나중에 '한계'라는 뜻으로도 변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있어야 할 국경선은 서로간 넘어서는 안될 '레드라인'이다. 미국남부에서는 가택침입자를 총으로 사살하는 것을 허용하는 관습이 있다. 그들은 결코 무단출입자에게 대화를 하자고 애걸하지 않는다.

 

'bound, 한계'와 같은 말뿌리인 'bond'는 결합, 접착제, 결속이라는 의미다. 20세기의 영웅 007의 이름이 'James Bond'였다. 'boundary' 'bound'와 어원이 같은 미스터 본드! 바람에 갈기를 날리며 아프리카를 질주하는 사자처럼 러시아를 향하여 고성능 최신 무기를, 그리고 숱한 여간첩들에게 자신의 남성을 힘차게 휘두르며 자유진영의 바운더리를 수호하던, 내 의식 속 강력 접착제로 붙어있는 그 이름, 제임스 본드가 그립다.

 


© 서 량 2017.09.04

-- 뉴욕중앙일보 2017년 9월 6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