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보다 더 절박한 가상의 정신과 환자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전율할 수 있겠는가. 익명을 요구하는 정신과 의사의 체험담을 통하여 인간 심층심리의 민낯을 살펴볼 요량이 있는가.
톰(Tom)은 내가 일하는 정신병원에 정신분열증으로 몇 년째 체류했던 무명의 권투선수였다. 링 안에서 상대를 때려눕히고 양손을 하늘로 들어올리던 화려한 기억에 매달리면서 병동생활을 해온 40대 중반의 백인이었다. 며칠을 샤워를 하지 않은 몸으로 목에 흰 타월을 걸치고서 가상의 상대와 섀도복싱(shadow boxing)을 하는 현실도피적 성향이 짙은 환자였다.
톰의 환청(幻聽) 증상이 큰 골치덩어리였다. 그는 다른 사람을 한방에 녹아웃(knockout) 시키라고 지시하는 악마의 목소리를 자주 들었다. 복도에서 톰에게 느닷없이 얻어맞은 병원 직원들과 다른 환자들은 도통 억울하기만 했다. 그가 먹는 정신과 약의 복용량은 최대치 수준이었고 그 때문에 걸음도 빨리 걷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그가 같은 병동에 기거하는 다른 환자 잭(Jack)에게 호되게 맞아 죽은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잭의 발길에 여러 번 쾅쾅 얼굴을 짓밟혀서 죽었다.
톰은 인근 종합병원으로 실려가서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며칠 후에 생을 마감했다. 감옥으로 옮겨진 잭은 환청증세가 전혀 없는 성격장애자였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깡패출신 50대 초반 흑인이었고 하루에 가벼운 진정제 몇 알만 복용하기 때문에 몸동작이 철 지난 권투선수 톰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톰이 밑도 끝도 없이 먼저 잭을 쳤기 때문에 정당방위라 했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남들이 뜯어말리자 잭은 공격을 잠시 멈추고 멀리 걸어가더니 다시 쓰러져있는 톰에게 돌아와 얼굴 뼈가 부서지도록 계속 짓밟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비 내리는 저녁 녘 환자들의 공격성을 잘 억제하는 몸집 좋은 남자 보조원들이 현장으로 급히 뛰어오기 직전에 오래 참았던 울음처럼 터진 사건이었다.
'boxing'은 'box'의 동사형이다. 우리말로 권투라 하지만 그대로 '복싱'이라고도 한다. 'box'는 상자라는 뜻의 우리말 영어. 외래어 표기법에 '복스'가 아니고 '박스'라 나와있어서 곧잘 맞춤법 혼동을 일으키는 단어다. 옛날 유럽에서 물건을 넣어두는 박스를 질이 단단한 'boxwood(회양목)'으로 만들었는데 고대영어가 일찌기 'wood'를 생략한 채 'box'라 부른, 바로 그 박스의 동사형이 복싱이다.
가로 세로 각각 6미터의 공간 로프 안에서 공격력 넘치는 두 사람이 심판의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 복싱은 마구잡이로 상대를 두들겨 패는 몸싸움이 아니다. 목적이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지 죽이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복싱은 박스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푹신한 패드(pad)를 넣은 글러브를 양손에 끼고 상대방 허리 아래를 때리면 안 되는 규칙을 엄중하게 지키는 스포츠다. 발길질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가장 공격적인 운동경기인 복싱이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원초적 공격성을 가장 억제해야 되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정신분석의 원조 프로이트는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다. -- "상대방 적수(敵手)에게 무기(武器) 대신 욕설을 퍼부었던 최초의 인간이 바로 문명의 창시자였다." (1893)
2017년 시월 초 추석에 즈음하여 먼저 공격을 시작한 후 몹시 얻어맞고 죽은 톰과 과격한 자기방어 때문에 감옥에 간 성질 더러운 잭을 생각한다. 그들이 프로이트 말대로 주먹과 발이라는 무기를 쓰는 대신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를 사용하여 도날드 트럼프와 김정은처럼 서로를 윽박지르는 차원에 머물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념에 젖는다. 그것이 가능했을까 싶지만.
© 서 량 2017.10.01
-- 뉴욕중앙일보 2017년 10월 4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컬럼| 298. 달콤한 굴복 (0) | 2017.10.30 |
---|---|
|컬럼| 297. 앙갚음 (0) | 2017.10.16 |
|컬럼| 295. 말없음에 대한 정신분석 (0) | 2017.09.18 |
|컬럼| 294. 바운더리(Boundary) (0) | 2017.09.04 |
|컬럼| 293. 표현과 설득 (0) | 2017.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