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91. 곶됴코여름하나니

서 량 2017. 7. 24. 13:11

오늘은 7 23, 너무 더워서 염소 뿔도 녹는다고 소문난 대서(大暑). 음력 24절기 중 딱 한복판 12번째로 소서와 입추 사이에 우뚝 선 일년 중 제일 더운 날인데 양력으로 치면 7 22일부터 24일 경이다.

 

더울 서()는 태양 아래에 한 놈(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불러일으킨다. 애써 상상력을 발동하지 않아도 땀이 뻘뻘 흐르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음양오행설에서는 여름을 불() 그리고 가을은 쇠()에 비유한다. 우리가 몸보신 겸 개장국과 영계백숙을 먹고 이빨을 쑤시는, 엎드릴 복자가 판을 치는 초복, 중복말복의 여름이다. 불 같은 땡볕아래 가을이 눈을 깔고 납작 엎드려서 항복(降伏)하는 계절이다.

 

'dog days'는 개 같은 날이라는 뜻이 아니고 양력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 사이를 점잖게 일컫는 표현이다. 개장국을 먹지 않는 영어권에서도 더위를 개와 연결시키는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이집트 사람들이 유심히 관찰한 바에 의하면, 매해 Sirius (dog star, 큰개자리)에서 가장 밝은 청백색의 별이 출몰하는 기간이 일년 중 제일 덥다는 단순한 인생경험에서 'dog days'라는 말이 생겨났단다.

 

며칠 전 퇴근 시간에 주차장에서 미국 친구와 마주쳤더니 그놈 왈, "Is it hot enough for you? (더위가 견딜 만해?)" 하길래 얼떨결에 "Wow, it's horrible! (아이구, 독하네!)" 했다. 그랬더니 또 그가 답하기를, "It's hot enough to burn a polar bear's butt. (북극곰 엉덩이를 데울 정도로 더워.)' 해서 둘이 킥킥대고 웃었다.

 

나중에 염소 뿔을 녹이는 더위와 북극 곰 엉덩이를 데우는 동서양 언어감각의 차이점에 대하여 생각했다. 우리의 비유법은 좀 잔인한 구석이 있는 반면 (뿔이 녹을 때 염소가 얼마나 괴로울까) 북극곰 엉덩이는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서구인들보다 감성이 더 세분화 된 우리는 덥다, 뜨겁다, 맵다는 세 뜻을 분별해서 쓰지만 양키들은 이 셋을 다 'hot'이라 뭉뚱그려 말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들은 같은 말에 인기가 있다거나 성적인 의미까지도 가미시킨다.

 

'A little pot is soon hot, 작은 냄비가 금세 뜨거워진다' 하는 속담에서는 기온이 아닌 물체의 뜨거움을 뜻한다. 'She is hot stuff' 하면 그녀가 섹시하다는 뜻이지 몸에 열이 있다는 말이 아니야! 'She is hot under the collar' 하면 그녀의 윗옷 칼라 아래가 (혹시 가슴이?) 뜨겁다는 게 아니라 그녀가 화가 났다, 소위 우리 관용어로 핏대가 났다는 뜻이다.

 

'hot'은 중립적이거나 좋거나 그리고 나쁜 뜻을 송두리째 품은 단어다. 'in hot pursuit' '밀착취재', 'hot tip' '꿀팁'이라는 의미. 'He is full of hot air'는 그의 입김이 뜨겁다는 말이 아니고 그가 허풍선이라는 뜻이다.

 

여름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뿌리를 찾다가 세종대왕 시절 1447년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우리말 책 용비어천가를 마주한다. 2장의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이렇다. -- 불휘기픈남간바라매아니뮐쌔 곶됴코여름하나니 --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아니 밀릴세 꽃 좋고 열매 많으니. (필자 )

띄어 쓰면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여름' '열리다'의 명사형이다. 마치도 '' '보다'의 명사형이듯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우리 조상들은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는 방의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 제켜 놓고 온갓 수목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황홀한 열림의 계절을 여름이라 이름했던 것이다.

 

© 서 량 2017.07.23

-- 뉴욕중앙일보 2017년 7월 26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