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87. 일사불란?

서 량 2017. 5. 30. 04:00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유독 좋아하던 국사 선생님을 기억한다. 육이오 사변 때 얼굴을 총탄에 맞은 결과로 생긴 흉터와 안면의 결손을 감추기 위하여 커다란 안경을 쓰시고 다니셨던 분이었다. 눈이 순한 양처럼 보이는 낙천적인 사람이던 그분에게 철딱서니 없는 우리들은 '반쪽'이라는 잔인한 별명을 붙여드렸다.

 

선생님은 훈시를 하실 때마다 사자성어를 쓰셨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입시에 붙으라는 뜻으로 "와신상담, 일로매진, 일사불란, 북진통일.."처럼 4분의 4박자, 마치 요사이 랩가수(rap singer) 식으로 리듬감 있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 중 "일사불란"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왜냐면 '불란'이라는 부분이 불 난 집에 부채질 한다, 할 때처럼 불이 났다는 식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불이 난 것처럼 본능을 들쑤시는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대학생 때나 군대에 군의관으로 있을 때도 나는 그 일사불란이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정신과 전문의가 된 후에는 그 분의 첫 번째 고사성어,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자꾸 떠오르곤 했는데 그건 와신상담이 '정신상담' 하고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이었지.

 

나는 이제 미국에서 너무 오래 살은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근 40여 년을 모국어를 멀리하면서 점점 더 사자성어 같은 유식한 문자가 싫어지는 반면 별, 하늘, , 엄마, 할아버지 같은 순수한 우리말이 그리워진다. 적폐청산이라는 말은 최근에 처음 들어보았다. 우스개 소리지만 나는 국정농단이 무슨 국가에서 지원하는 농구단(籠球團) 이름인줄로 알았다.

 

그때 그분은 육이오 때문에 얼굴의 오른쪽인지 왼쪽인지가 3분의 1 정도가 실종된 자신의 면목을 아침마다 거울로 확인하면서 얼마나 한 맺힌 삶을 사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네 번째 사자성어인 마지막 말을 복수심을 애써 감추면서 북진통일이라고 힘주어 발음하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은 한 오라기의 실도 엉키지 않아서 질서가 정연하여 조금도 흐트러지지 아니하다는 뜻이라고 사전은 풀이한다. 화재발생하고는 전혀 무관한 말일 뿐더러 살벌할 정도로 엄격한 군대행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또 인맥문화(人脈文化)에 허덕이는 우리 한국사회의 병폐에서 완전히 벗어난 닭살 돋는 원칙주의의 지독함을 방불케 한다. 일사불란하다는 말은 김정은의 고집불통 사고방식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좋아했던 그 국사 선생님의 심층심리에 공산주의적 사고방식이 잠복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분도 인간일지언정,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가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으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지.

 

얼마 전 병원직원들과 회의도중에 너무 심하게 웃었더니 눈물이 나와서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당신은 떠들썩한 유원지에서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를 타본 적이 있지 않은가? 위험천만한 그때 당신이 으악, 하는 얼굴 표정과 생일 축하 합니다, 하는 깜짝 파티 선언에 소스라치게 놀라 찍힌 핸드폰 사진의 얼굴 표정이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은가? 아무리 극과 극이 서로 통한다 하지만 말이징.

 

영어에는 일사불란하다는 말이 딱히 없다. 끽해야 'in constant motion (끊임없이 움직이며)', 아니면 'in apple pie order (질서정연하게)'라는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저 육중한 중국말, 일사불란하다는 말이 풍기는 공격적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는다.

 

입때껏 내 의식구조를 떠나지 못하고 사춘기 시절 기억에 단단히 못박혀 계신, 성함이 생각나지 않으면서 기괴한 얼굴만 떠오르는 그 국사 선생님을 한참 추억했다. 미국 현충일(Memorial Day)을 맞이하여서.

 

© 서 량 2017.05.29

-- 뉴욕중앙일보 2017년 5월 3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