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90. 우리는 왜 싸우나

서 량 2017. 7. 11. 08:59

2017년에 접어들면서 한국 드라마에 말싸움을 하는 장면이 부쩍 많아졌다. 연적(戀敵)들은 물론 부모형제, 직장동료, 등등 가까운 사람들끼리 말싸움을 한다.    

 

상대방의 약점을 손톱으로 긁다시피 찬바람이 싹싹 도는 말을 내뱉는 여자가 티브이 화면에 나온다. 언어감각이 세련되지 못하면서 옷을 아무렇게나 입은 젊은 여자가 악을 바락바락 쓰기도 한다. 이것은 범죄영화에서 사내놈들이 서로 치고 박는 몸싸움과 전혀 다르다.  

 

권투선수들이 사각의 링 안에서 살기 어린 눈초리로 상대를 쏘아보며 하는 조용한 몸싸움은 주로 남자들의 영역이다. 만류의 영장인 인간의 모듬살이에 있어서 여자들이 의사전달과 소통에 심혈을 기울이는가 하면 태어나기를 여자에 비하여 어눌하게 태어난 남자들은 어쩔 수 없는 실천주의자로 군림한다. 말을 잘하는 남자는 여성적인 남자랄 수 있고 행동을 위주로 하는 여자는 남성적인 여자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할 때 힘내라!’ 하고 낮게 말하는 대신에 화이팅(Fighting!)이라 복식호흡으로 일갈한다. 이 기괴한 구호는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자폭을 일삼던 일본 자살특공대원들이 최후로 전투기에 탑승할 때 외치던 비참한 일본식 영어였다.

 

‘fight’의 말 뿌리는 전인도 유럽어에서 털이나 머리칼을 뽑는다는(pluck out) 뜻이었다. 5000여 년 전 영어의 어원학적 선조들은 몸싸움을 할 때 상대방의 모발을 움켜쥐는 것으로 서두를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다. 그렇게까지 오랜 역사를 거슬러갈 필요는 없다. 당신도 어린 시절 길거리에서 몸집이 튼실한 2,3십대의 여자 둘이서 서로 머리채를 움켜쥐고 싸우는 광경을 몇 번쯤 목격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돌이나 막대기를 무기 삼아 서로들 싸우기 전 시절에 인류는 맨주먹이나 맨손을 사용했겠지 싶다. 그런 초보적 공격행위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란 서로 상대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거나 잡고 흔들거나 쥐어뜯는 짓이었을 것이다.

 

사내놈들이 주먹으로 상대를 때려눕히는 몸싸움은 까닥 잘못해서 치명적인 결과가 생기는 일이 빈번하다. 그러니까 살인혐의나 과실치사로 몰리고 싶지 않으면 상대의 머리칼을 한 움큼 뜯어내는 것이 훨씬 현명한 처사라는 깨달음이 있을지어다. 마침 또 상대가 대머리거나 스포츠 컷 머리라면 어쩌냐고? 그런 경우에는 에헴, 우리 몸싸움을 하지 말고 말싸움으로 합시다, 하며 점잖게 제안하면 되지!

 

말싸움을 영어로 ‘word fight’이라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그 대신 ‘quarrel, 말싸움은 표준영어다. 이 말은 원래 고대불어에서 불평하고 투덜댄다는 뜻이었다. 언쟁은 섹스처럼 둘이서 하는 행위로 보이지만 어찌 보면 일방적인 심리상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싸우나하는 화제를 놓고 얼마 전에 환자들과 자유토론을 할 기회가 있었다. ‘권력을 갖기 위하여 싸웁니다’, (“We fight to get the power.”)가 가장 유력한 대답이었고 환자들은 마치도 정답이라도 얻은 듯 더 이상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무서워서 싸웁니다’, (“We fight because we are afraid.”)라는 답변도 나왔다.

 

김소월의 진달래를 읊조리는 당신이 투덜대면서 내게 말싸움을 걸어 올까 겁이 나지만,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는 중, ‘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하는 이상의 오감도(烏瞰圖)가 떠오른다.(1934)  

 

당신이나 나 같은 속물들은 권세를 추구하기 위하여 정치적인 언쟁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이루지 못한 소망에 대한 미련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무서움 때문에 애먼 사람에게 투덜대고 말싸움을 걸고 싶은지도 모른다.

 

© 서 량 2017.07.10

-- 뉴욕중앙일보 2017년 7월 12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