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89. 뜨거운 한국인

서 량 2017. 6. 26. 12:52

2017 6 22일 코리아 헤럴드는 인터넷에서 한 영국매체가 띄운 어느 항공회사의 광고문, 'RED HOT FARES & CREW'를 헤드라인으로 소개했다. 표제 바로 아래에 몸에 브라자와 팬티만 걸친 여자가 반쯤 웃는 얼굴로 허리를 옆으로 꺾고 서 있다.

 

이 광고문구의 한글 번역, "해외여행 갈 때는 섹시한 가격과 승무원"이라는 부분에 관심이 쏠린다. 섹시한 가격이라니. 광고 모델은 얼마든지 섹시할 수 있지만 항공요금이 섹시하다고?

 

'red hot'은 뜨거운, 격렬한, 따끈따끈한, 혹은 인기가 좋다는 뜻인데 이걸 섹시하다고 옮긴 논리의 비약이 억지스럽다는 느낌이다. '착한 가격'이라는 유행어가 이제는 우리들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일까.

 

'러브콜(love call)'이라는 콩글리시를 생각한다. 동물들이 짝짓기를 목적으로 발성하는 구애(求愛)의 소리가 러브콜이다. 한 밤중에 발정한 고양이가 지르는 괴성(怪聲)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러브콜은 원래 일본 백화점에서 단골 고객들에게 미리 연락을 해서 물건을 서류상 먼저 구입하게 하고 나중에 세일기간이 되면 대금결재를 하는 일본적인, 너무나 일본적인 판매전략을 뜻한다. 우리는 그 말을 직수입했다. 한국식 개념으로는 유력한 정치가나 뛰어난 운동선수를 특정 지위에 발탁하거나 스카우트하는 일을 러브콜이라 지칭한다.

 

섹시한 항공요금이나 정치가의 계산적인 구애작전처럼 우리는 언어학적으로 정감이 철철 넘쳐흐르는 집단인 것 같다. 엊그제 TV에서 한 정당이 다른 정당의 안건진행을 저지하는 사태를 놓고 당의 '발목'을 잡는다고 역설하는 장면을 보았다. 이렇듯 우리는 일상사를 의인화(擬人化)시키는 습성의 노예가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가 인맥문화(人脈文化)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인지.

 

오래 전부터 '코스프레'가 불어인 줄로 알고 지내왔다. 얼마 전에야 비로소 영어, 'costume play'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배웠다. 위키백과에 첫 번째로 대뜸 일본어라고 나와 있고 우리말로 '의상 연기, 분장놀이'로 해석한다. 영어가 맨 나중으로 나열된 것이 기이하다.

 

코스프레는 쟁글리시(Janglish, 일본식 엉터리 영어)의 좋은 본보기다. 이를테면 핼러윈데이에 어린애가 슈퍼맨이나 드라큘라로 분장하는 경우를 일컫는 말. 일제 강점기를 역사의 뒤안길에 매장한 세종대왕의 자손들이 아직도 무분별하게 추종하는 일본어다.

 

2003년에 국립국어원의 새로운 말 자료집에 수록된 단어, 코드인사(code人事)도 언어학자들의 신경을 건드린다. 비슷한 말로 낙하산인사라고도 하는 이 신조어를 사전은 '이념성향이나 사고체제가 똑 같은 사람을 정부의 관리로 임명하는 인사방침'이라고 풀이한다.

 

코드인사는 막말로 끼리끼리 해먹는다는 뜻이다. 미국영어에서 195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한 'cronyism'과 같은 말이다. 이 단어를 'code personnel administration'이라 곧이곧대로 옮기면 딱 좋겠지만 그런 이상한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당신과 나처럼 불철주야로 콩글리시에 시달리는 예민한 부류 말고 세상에 아무도 없다.

 

2017 6월 마지막 주를 어느 인터넷 신문에서 "인사청문회 '뜨거운 한 주' 예고"라고 한 머리기사를 본다. 다른 여러 신문사들도 '슈퍼 위크'라는 타이틀을 내세웠다. 이 콩글리시를 역으로 직역해서 우수한 한 주라고 하면 얼른 뜻이 통하지 않는다. 그대신 뜨거운 한 주라는 훌륭한 의역에 나는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섹시한 가격을 밝히고 자주 러브콜을 보내고 일본말 악센트가 팍팍 들어가는 코스프레를 즐기면서 끼리끼리 국가를 통치하려고 TV 인사청문회에 뜨겁게 반응하는 3종 세트 언어권의 한국인들이다.

 

© 서 량 2017.06.25

-- 뉴욕중앙일보 2017년 6월 28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