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에 대하여 생각한다. 사전을 찾아보며 생각했다. 막말의 첫째 뜻은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는 말. 둘째로는 뒤에 여유를 두지 않고 잘라서 하는 말을 의미한다.
첫째 뜻으로 보면, 당신이 말을 함부로 내뱉는 순간 미안하지만 당신은 세련되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는 수가 있다. 코냑처럼 정제된 비싼 술을 꼴짝꼴짝 마시는 고상한 귀족이 아니라 쌀과 누룩을 대충 걸러낸 싸구려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시정잡배로 보일 것이다.
막말은 로코코 시대의 우아한 왈츠보다 지 멋대로 몸을 흔드는 막춤의 현대적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막소금, 막소주, 막국수, 막가파, 막노동 같은 말에 들어가는 막자 돌림이 그 좋은 예. 또 있다. 인감증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함부로 써도 좋은 막도장. 게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을 모욕하고 싶을 때 당신이 호칭하는 '막'돼먹은 사람은 어떤가.
막말의 둘째 뜻은 상대방이 자기 의견을 제기할 기회가 없도록 딱 잘라 말하는 당신의 수상한 화법이다. 언쟁이 일어났을 때 상대의 말문을 콱 막아버리는 마지막 말을 하려고 기를 쓰는 우리가 아닌가.
이런 의미로 '막'자가 들어가는 말에는 막바지, 막판, 막차, 막내, 그리고 다음 회가 궁금해지는 막장 드라마의 끝 장면 같은 애절함이 있다. 마지막 통통배가 바다 저 멀리 떠나가거나 한 여성이 더 이상 출산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의 조용한 체념이 엿보인다. 역사드라마를 보면 죄인을 처벌할 때 나오는 망나니가 칼을 휘두르며 덩실덩실 추는 춤도 사실 막춤이다. 사람 목을 내려치기 전에 허공부터 절단하는 예행연습을 하는 망나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망나니는 언동이 막된 사람을 지칭한다.
고려대학 명예교수 김민수 편, 우리말 어원사전(1997)에 의하면 이렇다. 망나니의 말뿌리는 막(粗) + 낳은(出) + 이(者). 다시 말해서 조잡한 출신의 사람이라는 뜻.
요즘 '오리발'과 '섞어찌개'라는 용어가 인터넷에서 자주 눈에 밟힌다. 둘 다 순수한 우리말이라서 귀에 금방 쏙 들어온다. 오리발을 '압족(鴨足, 오리 압, 발 족), 그리고 섞어찌개를 '잡탕(雜湯)'이라 묵직한 한자어를 쓰면 소위 '품위' 있게 들릴 것 같다. 그러나 전라도 말로 누구를 싸잡아 욕할 때 '잡(雜)것'이라 하는 걸 보면 잡탕이라는 말도 쪼까 거시기하다.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시한 후 1910년에 주시경이 우리말을 '한글'이라 명명하기 전까지 우리말을 언문(諺文)이라 했다. 중국을 숭상했던 우리 선조들이 의사소통을 한자어(漢字語)로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마냥 슬프다.
'언(諺)'은 옥편에 '자랑하다, 공손하지 못하다, 강하고 억세다'는 뜻으로도 나온다. 오리발이나 섞어찌개라는 말에는 언문이 품고 있는 건방지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언성을 높여 언문으로 한마디 던지노라. 당신이 도대체 뭐길래 오리발이라는 막말일랑 눈 딱 감고 봐주면서 섞어찌개만 막말이라고 손가락질 하는가.
막말을 영어로 'rough words'라 한다. 고대영어에서 'rough'는 'f' 발음을 빼고 그냥 'ruh'라 발음했다. 발음상 'raw (날 것, 요리하기 전 상태)'와 참으로 비슷하다. 'rough'는 거칠고 조잡하다는 말. 그래서 'a diamond in the rough'는 '다듬지 않은 금강석'을 뜻한다. 의역으로는 숨은 인재! 소위 요새 항간에서 유행하는 말로 잠룡(潛龍)이다.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깊은 물 속에서 몰래 숨쉬는 불쌍한 용!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에게 압족(鴨足)을 제출하지 말라고 점잖게 타이르면 어떨까. 강물이 오리 얼굴 같은 녹색이면서 두만강 옆에 길게 누워있는 압록강(鴨綠江)이라도 연상하면서.
© 서 량 2017.3.5
--- 뉴욕 중앙일보 2017년 3월 8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17/03/07/society/opinion/50680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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