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79. 빵을 주무르는 하녀

서 량 2017. 2. 5. 07:53

40여 년 전 수련의 시절 하루는 회진 중 수련의부장이 환자 어머니에게 성급하게 "Lady, listen to me! (숙녀님, 내 말을 들으세요!)" 하자, 그 여자가 볼멘 목소리로 "Don't lady me! (날 숙녀라 부르지 말아요!)" 하던 기억이 난다.

 

엊그제 인터넷 쇼핑회사에 무슨 일로 항의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상대방 젊은 놈이 언성을 높이면서 "Sir, you are not listening! (선생님, 제 말을 듣지 않으시는군요!) 하길래 나도 "Don't sir me! (선생님이라 부르지 마시오!)" 하며 소리쳤다.

 

40여 년 전에 듣던 대화와 내가 전화로 한 말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둘 다 'lady' 'sir'라는 경칭을 써서 상대를 압박하는 대화방법이었다. 경어에 적대감이 숨어있었다.

 

고급 호텔 여자 화장실 문에 아름다운 필기체로 'Ladies', 남자 화장실에는 'Gentlemen'이라 써있는 것을 눈여겨 보기를 바란다.

 

솔직히 말하는 게 어때. 우리가 용변을 보는 행동이 숙녀적이고 신사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동물적인 행동을 애써 미화시키는 사람 마음이 측은하다고. 미국인들이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할 때 'Ladies and gentlemen! (신사 숙녀 여러분!)' 하는 것도 좀 수상하게 들린다고.

 

'lady'는 원래 고대영어로 '빵을 반죽하는 하녀'라는 뜻이었다. 옥스포드 사전은 "결코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지만, 이 어원에 대하여 더 나은 설명은 아직 없다."고 해명한다.

 

'lady'1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상류사회에 속하는 여자를 뜻하게 됐다. 거의 같은 시기에 'lady killer'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숙녀를 죽이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바람둥이'라는 뜻이었다.

 

'sir'는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라는 으리으리한 귀족들보다 한 계층 아래인 준남작과 그보다 또 바로 아래 'knight (기사)' 계급에 대한 존칭이었다. 기사들은 긴 창을 손에 들고 말을 달리던 운동신경이 발달한 젊은이들이었고 평소에 귀족들의 보디가드로 일했다. 창이나 칼보다 핵무기가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 반짝이는 갑옷을 입고 말을 달리는 기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혹은 선생님으로 번역되는 'sir'는 비록 기사는 아니지만 아직도 영국 여왕이 평민에게 부여하는 명예로운 호칭이다. 여왕은 십자군 시대 전통대로 괜찮다 싶은 사계의 권위자들이며 예술인들의 양쪽 어깨에 칼을 뉘어 한 번씩 건드리면서 작위를 수여한다. 'Beatles' 'Paul McCartney' 'Rolling Stones' 'Mick Jagger''knight' 작위를 받았고 그들 이름 앞에 심심찮게 'Sir'라는 경칭이 붙는다.

 

'knight'는 고대영어로 남자 하인, '머슴'이라는 뜻이었다. 우리가 허드레 일꾼을 김씨, 박씨 하듯 서구인들은 마당쇠를 'Sir' 라 불렀던 것이다.

 

우리말에도 호칭이 혼동을 일으킬 때가 많다. 여자가 자기 남편을 서방님이라 부르면서 결혼한 시동생도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게 들린다.  

 

지금껏 11세기의 경칭을 숭상하는 우리들은 황야를 질주하던 기사의 풍모를 새까맣게 잊고 이제는 손가락으로 핸드폰과 피시(P. C.)의 자판을 달린다. 현대적 의미의 귀족들이 성립해 놓은 계급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그 상류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스란히 느끼는 당신과 나는 오늘도 "Lady!" 혹은 "Sir!" 하며 언성을 높이고 있다. 빵을 주무르던 하녀의 손길과 막일을 하던 머슴의 투박한 눈초리가 어른거리는 존칭 속에 숨어있는 적개심을 감추지 못하면서.

 

© 서 량 2017.02.04

-- 뉴욕중앙일보 2017년 2월 8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