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이라는 단어를 자세히 살펴본다. 법은 한자어다. 순수한 우리말에는 법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아무래도 옛날에 우리의 선조들은 법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법이라는 말은 단연코 중국에서 수입된 개념이다. 사전에 나와있는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규범"이라는 풀이 또한 줄줄이 한자어의 연속이라서 등골이 서늘해진다. 법을 어기면 감옥에 간다는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아주 위협적인 발언이다.
'法'을 옥편은 물(水)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간다(去)는 원칙에서 유래했다고 해설한다. 다시 말해서 물이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는 내막이다. 물은 위쪽에서 아래쪽으로만 흐르는 청산리 벽계수처럼 수직적인 운동성을 지닌다.
중력이란 뉴턴의 사과나 옥상에서 뱉는 침이 땅으로 떨어지는 만유인력의 결과다. 어릴 적에는 법이 물 흐르는 이치와도 같다는 개념이 아주 쿨하게 여겨졌지만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다. 따지고 보면 동양적 의미에서의 법이란 따분할 정도로 종적인 개념이다.
'law'는 전인도유럽어에서 층(層, 겹)이라는 뜻의 'lay' 또는 'layer'와 같은 어원에서 생겨난 말이다. 그것은 마치도 공룡의 화석이 박혀있는 지층(地層)이나 한 겹을 벗기면 또 다른 겹이 나타나는 양파처럼 켜켜이 쌓여있는 구조를 이룬다. 서구적인 법이란 유유하거나 요란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유동적이라기보다 다분히 고요하고 정적인 양상을 띄운다.
변호사가 피고를 두둔하고 보호하는 반면에 검사나 판사는 한 사람을 처벌하는 동기의식에 몰두하거나 그 사람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최종 결정권을 내린다는 점에서 그 위력이 실로 막강한 사람들이다.
잠깐만! 변호사(辯護士)에는 '선비 사'가 들어가지만 검사(檢事)와 판사(判事)는 '일 사'자로 끝나는 것에 대하여 당신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자고로 검사와 판사는 선비가 아니라는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의사나 간호사에게는 스승 사(師)라는 귀한 호칭이 부여되지만 검사와 판사는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풍기는 것일까. 하다못해 다른 사람을 향하여 칼질을 하는 검객(劍客)을 뜻하는 검사(劍士)도 선비 사로 끝나지 않는가 말이다.
'칼'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하자면, 판사가 내리는 판결이라는 말에도 칼로 자른다는 뜻이 숨어있는 것이 어원학적으로 흥미롭다. 옥편은 판(判)자의 오른쪽 부분을 '선칼도방 부'라 부른다.
'judge(판사, 재판장)'는 14세기 말에 고대불어에서 파생된 말로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judge'는 또 구약성경 사사기(士師記, Book of Judges)에 나오듯이 고대 유태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전시(戰時)에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권한이나 권력(power)을 뜻한다.
그렇다. 변호사를 제외한 현대의 법관들에게 부여되는 결정권을 일종의 권력행사로 보아 마땅하다. 판사의 판결은 지혜로운 결론을 내리는 기쁨이라기보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기계적인 중력현상이나 다름없다. 검사와 판사는 사람이면서도 사람 구실을 충분하게 하지 못하는 셈이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죄인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로서 누리는 특권과 쾌감이 정말로 대단할 것이라는 추론을 음미해본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1783~1842)이 쓴 '연애론(1822)'에 이런 말이 나온다. -- 정부가 아무리 위선적으로 말을 할지라도 그들의 권력행사야말로 가장 큰 쾌락이다. 내 소견으로는 정부의 권력을 능가하는 단 하나의 힘이란 저 행복한 질병, 바로 사랑의 힘이다. -- 이 말을 굳이 유식한 사자성어로 측은지심이라 이른다.
© 서 량 2017.04.02
-- 뉴욕중앙일보 2017년 4월 5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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