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혹시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가 열연한 1990년 영화 프리티 우먼(Pretty Woman, 귀여운 여인)을 기억하는가?
개인 소유 제트기를 타고 뉴욕과 캘리포니아를 자기 안방처럼 드나드는 억만장자 에드워드는 창녀 비비안에게 홀딱 반한다. 파란곡절 끝에 비비안은 같이 살자는 그의 인간적인 유혹과 제안을 강하게 거절한다. 돈과 권력을 거부하는 그녀에게 깜짝 놀란 그는 금전적 이익을 위하여 다른 기업을 매수해서 통째로 잡아먹는 자신의 사업방침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그는 사업가들끼리는 서로간에 있어서 공생공존이 최선의 길이라는 뼈아픈 깨달음이 있은 후 비비안과 따스하게 결합한다.
30년 전만 해도 그랬다. 풍족한 남자가 사회적으로 불쌍한 여자를 향하여 애정을 품고 그녀에게 접근했던 시대풍조가 만연했다. 과장하자면, 딸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보호본능이 펄펄 살아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딸자식의 호소력은 스스로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진솔한 상황에 있거늘. 그러나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쌍방이 앞을 다투어 강하기만 하면 결국 싸움 밖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음양(陰陽)의 법칙이란 이토록 터무니 없이 단순하다.
2016년 10월 19일 도날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마지막 대선 토론에서 트럼프는 클린턴 발언 도중에 "Such a nasty woman! (이토록 끔찍한 여자!)"라며 그 특유의 독특한 언성으로 토를 달았다. 그들은 명실공히 아주 강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21세기의 급변하는 시대정신 때문에 귀여웠던 여자와 끔찍한 여자가 이루는 대조가 눈부시다.
‘pretty’는 고대영어에서 영리하고 교활하다는 말이었다. '여우 같다'는 표현처럼 한동안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가 15세기에 들어서서 귀엽고 예쁘다는 좋은 뜻으로 변했다. 여우가 우호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을 보면 영리하고 교활한 인간의 품성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진작부터 좋아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예쁘다'는 옛날 말 ‘어여쁘다’의 준말이다. 일찍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 1446년)에서 말씀하신 대로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들이 할 말이 있어도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을 “어였비너겨” 했을 때, 그 ‘어여삐’ 여긴다는 말은 불쌍하게 생각한다는 뜻.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미운 살 뻗치는 상대보다 좀더 예뻐 보이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nasty’는 고대 불어에서 14세기에 영어로 영입된 단어로서 원래 더럽고 불결하다는 뜻이었다. 사전에는 끔찍한, 고약한, 험악한 외에도 추잡하다는 의미도 나와있다. 그래서 추잡한 농담을 ‘nasty joke’라 한다. 날씨가 험악하다는 말 대신 날씨가 더럽다고 해도 뜻이 통할뿐더러 물건 값이 더럽게 비싸다고 하면 대단히 비싸다는 뜻. 기분이 더럽게 좋다는 말도 있다. 매우 예쁘다 하는 대신 더럽게 예쁘다 하면 어떤가?
클린턴과 트럼프의 마지막 대선 토론이 있은 다음날 병원 복도에서 한 미국친구에게 지나가는 말로 그 프로그램을 보았느냐 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일부러 안 봤다고 대답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댄다. “What do you expect? One is a kookoo and the other is a criminal, you know? – 뭘 기대하겠어? 한 사람은 미친 놈이고 다른 사람은 범죄자잖아?”
트럼프는 말을 험악하게 하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라서 ‘nasty’하다는 평을 들어 싸다. 그는 클린턴이 만만치 않게 똑똑하고 더럽게 야무진 여자라는 의미에서 “Such a nasty woman!”이라 뇌까렸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두 남녀는 정말 형편없이 끔찍한 인간들이다.
© 서 량 2016.10.31
-- 뉴욕중앙일보 2016년 11월 2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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