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의 기능 중 초자아(superego)가 자아(ego)를 대하는 품새는 마치도 부모가 자식을 다루는 태도와 흡사하다. 초자아는 법과 질서를 일깨워주는 부성적(父性的)인 면 외에도 자아이상(ego ideal)을 북돋아주는 모성적(母性的)인 부드러움을 지닌다.
정신과 의사 피어스(Piers)와 인류학자 싱어(Singer)가 쓴 "Shame and Guilt" (1971, Norton)를 다시 읽었다. 당신과 내가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수치심과 죄책감의 정신분석적 해석과 인류학적 성찰로 가득한 100페이지 남짓한 얇은 책이다. 부끄러움과 죄의식이라는 우리의 정서는 온전한 초자아의 발육에서 비롯한다고 그들은 강조한다.
일설에 의하면 고대영어에서 '빚을 갚다'는 뜻으로 통했던 'guilt'는 참으로 딱할 정도로 서구적인 개념이다. 죄책감이란 빚을 지듯 죄를 짓고 나서 벌을 받아 적당하게 갚아버리면 고만이라는 논리의 지배를 받는 듯하다. 미국식 범법자는 벌을 모면하거나 조금이라도 덜 받으려고 법정에 출두하여 요란한 변론을 거친 후 판결을 받는다. 서구적 죄의식은 묵묵한 반성보다 말 빠른 변호사의 테크닉에 매달린다.
고대영어에서 'shame'은 금전관계를 청산하는 행동과 전혀 무관한 '불명예, 모욕, 수치심' 같은 심리를 지칭하는 뜻이었다. 싱어는 수치심이란 전적으로 동양적 의식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전통적 견지에서 보았을 때 서양이 죄의식 문화라면 동양은 수치심 문화에 뿌리를 박고 있다.
작금에 있어 한국인의 수치심은 운동모자를 푹 눌러쓰고 대문짝 만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게 한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어려운 문자로 엄숙하게 대접받는 범법자의 감춰진 얼굴을 인터넷 신문에서 조석으로 본다. '토막 살인자'의 사악한 얼굴을 신문에서 히트 영화 광고하듯 보여준다 했더니 돈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를 계획적으로 죽인 아들과 딸이 스스로 자기네들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한 기사 또한 읽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얼굴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낯이 두터워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뜻의 후안무치(厚顔無恥), 철면피, 체면, 안면몰수, 낯을 들지 못한다, 무안(無顔)하다는 표현, 그리고 당신과 나의 얼굴이 종잇장이 아닌 데도 얼굴도장을 찍는다는 말이며, 웬 놈의 얼굴이 들어가는 심리표현은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도대체 얼굴이 무엇이길래 우리는 부끄러울 때 팔목이나 무릎이나 등허리 대신 꼭 얼굴을 붉히는가. 당신과 내가 서로 노골적인 혹은 은밀한 의사를 소통할 때 얼굴의 역할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눈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바르고 아침마다 면도를 하거나 콧수염을 다듬는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부끄럽게 웃을 때 입을 손으로 가리는가.
'shame'의 전인도유럽어에 해당되는 말은 부끄럽다는 뜻에 앞서 '가리다(cover)', 즉 '감춘다'는 의미였다. 'shame'과 같은 말 독일어의 'Scham'은 워낙 치부(恥部)라는 뜻! 치골(恥骨)은 볼기뼈의 앞과 아래쪽을 이루는 부분이면서 순수한 우리말로는 '두덩뼈'라 사전에 나와있다.
내친 김에 한 걸음만 더 내디뎌도 괜찮으리라 싶은데. 치골, 즉 두덩뼈를 영어로 'pubic bone'이라 한다. 'pubic'은 'puberty (사춘기)'와 말뿌리가 같은 라틴어의 '성숙'했다는 뜻이다. 동양에서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뼈를 서양에서는 성숙한 뼈라고 당당하게 치부(置簿)하는 것이다.
1987년 뉴욕에서 운이 좋아 당선된 신춘문예 당선 작, 내 졸시 "대중탕 수증기"의 시작 부분이 불쑥 떠오르는 순간이다. -- "옆으로만 열리는 젖빛 유리 미닫이가 가장 떳떳한 부끄러움을 가리고 있었다."
© 서 량 2016.05.15
-- 뉴욕중앙일보 2016년 5월 18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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