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57. 끈덕진 사랑이라니!

서 량 2016. 4. 5. 10:01

'transience'는 우리말로 '덧없음'이라 해야 근사한 번역이 될 것이다. 문자를 쓰고 싶으면 무상(無常)이라는 한자어를 써도 좋다. 'transience'의 첫 부분 'trans' 'transportation(교통)'이나 'translation (번역)' 할 때의 'trans'와 같은 뜻으로서 관통하거나 건너간다는 동적(動的)인 의미를 갖는다.

 

불교에서는 걸핏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개념을 들먹인다. 자칫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말은 사실 지극히 과학적인 진술이다. 우주 자체가 점점 팽창하고 있다는 데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의 섭리는 불변이라고? 글쎄?

 

하버드 대학 심리학 교수 대니얼 섁터(Daniel Schacter) 2001년에 'The Seven Sins of Memory(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책을 써서 건망증이 심하거나 치매를 두려워하는 당신과 나에게 호소한다. 2006년에 우리말 번역판도 나왔다.

 

대니얼 섁터는 기억의 첫 번째 죄로 ' Transience(덧없음, 無常)'이라는 불교적 개념을 내세운다. 무제한의 용량을 지닌 하드 드라이브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기억의 파일이 자꾸 사라져야 새로운 정보가 비집고 들어설 공간이 생길 것이다. 당신이 입버릇처럼 뇌까리는 마음 비우기라는 슬로건도 이 현상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러나 마음이 비워지기만 하고 새로운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치매다.

 

두 번째 죄목은 'Absent-mindedness(정신 없음)'이다. 정신이 휴가를 떠나고 집에 없기 때문에 어떤 외부적인 메시지도 전달이 되지 않는 상태다. 차 열쇠를 어디에 무심코 놓았길래 출근 시간이 임박한 당신은 그토록 발을 동동 구르는가?   

 

세 번째로는 'Blocking(막힘)'의 죄. 이를테면 당신이 조지 워싱턴 다리를 운전할 때 교통이 꽉 막혀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신경 전류의 유통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 영화 제목이나 얼마 전 소개를 받은 사람의 이름이 혀끝에 맴돌면서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네 번째 죄명으로 ‘Misattribution(오귀인, 誤歸因)’이라는 어려운 말이 있다. 이것은 기억을 못하는 게 아니라 엉뚱한 기억을 하는 경우다. 어떤 꿈을 꾼 후 자기가 그 일을 생시에 경험한 것으로 착각을 하는 수가 있다. 특히 다 큰 어른이 상상의 날개를 펼친 결과로 어릴 적에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굳게 믿는 황당무계한 사례가 생각보다 잦다.

 

다섯 째가 ‘Bias(편견)’. 치우친 견해나 생각이 올바른 기억을 훼방 놓는다. 여섯 번째는 ‘Suggestibility(피암시성)’으로서 최면술의 기본 메커니즘이다. 비라도 내리는 어느 날 조용한 카페에서 그녀가, "당신이 그때 그랬잖아!" 하고 암시하면 "아, 그랬나?" 하며 정말 자신이 그랬다고 믿는 우리가 아니던가.

 

마지막 일곱 번 째 ‘Persistence(끈덕짐)’는 아무리 잊으려 해도 어떤 기억이 집요하게 떠오르는 경우다.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심리적 외상 스트레스 장애)가 전형적인 예. 논리의 비약이 심하지만 사랑 또한 끈덕진 심리적 외상이다.

 

‘commemorate(기념하다)’, ‘memento(기념품)’ 같은 어려운 말들도 ‘memory’와 어원이 같다. 무엇을 기념하는 것은 무엇을 기억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나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 당신은 무엇을 기념하겠는가. 슬픈 일? 기쁜 일? 지극히 사적인 일? 섁터가 지적하는 일곱 가지의 죄악이 전혀 없이?

 

© 서 량 2016.04.04

-- 뉴욕중앙일보 2016년 4월 6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