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형용사
김정기
여름 한낮에 움직이는 고요는
한마디 형용사다.
언제나 뒷그림자에 숨은 여린 얼굴도
그늘에 일렁이는 영화 장면이 된다.
멀리 있는 줄 알았던 팔월도 눈앞에 다가서니
벌써 나는 얼마큼 와 있는지.
아까워하던 아침저녁의 노을도
시름시름 가던 날도 정오의 뙤약볕에 뛰어간다.
진작 간수하지 못한 나날도 녹아 흐른다.
헐겁게 빠져나간 외로움까지도 찾을 수 없는 한낮
등을 보인 친구에게 여름을 주려고 손을 내민다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에
더 환하고 더 부드러운 것이 없기에
맞바람 치는 창가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바람에 실려 오는 풋내
여기서 모두 정지하기를
거둘 것이 아직 있으면 나누기를
지금 땅 밑에도 여름볕 밝게 드리워
주황색깔 나리 꽃잎 지는
여름 형용사
© 김정기 201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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