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의 백인 여자가 정신병동에서 환청증세에 시달리며 망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각과 행동이 비정상이라는 이유로 병동 직원들은 그녀를 제압하고 저지하고 매일 약물을 투여한다.
성질이 난폭한 그녀와 아무도 섣불리 말을 섞지 않는다. 간호사들이 주먹으로 얻어맞고 병원 기물이 파손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펜실베이니아의 명문 공과대학을 졸업한 그녀에게 나는 깊은 관심을 쏟는다.
그녀는 아침나절을 "Leave me alone!" 하며 소리치면서 방문을 닫고 혼자 흐느낀다. 나는 그녀의 슬픔과 분노를 한참 내버려 뒀다가 격한 감정이 썰물처럼 가신 후에 긴 대화를 나눈다. 내 말 좀 들어보라며 반쯤 양해를 구하고 반쯤 으름장을 놓고 그녀의 'delusion (망상)'이 'fantasy (환상)', 'imagination (상상)', 'daydream (백일몽)' 같은 정신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저승에서 함께 살자고 하는 죽은 아버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서움에 몸을 떤다. 아버지는 그녀를 퇴원시키라는 편지를 내게 썼다는 소식도 딸에게 전한다.
'delusion (망상)'은 중세영어로 'deceive (속이다)'라는 의미였다. 사실 당신도 나도 망상으로 뒤엉킨 말을 듣는 순간 상대가 나를 속이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덜컥 들기 마련이다.
고대 불어의 'fantasie'가 영어의 'fantasy (환상)'로 변했는데 변덕스럽다거나 빛이라는 시각적인 뉘앙스가 있다. 'photo (사진)'나 'fancy (공상)'도 'fantasy'와 말뿌리가 같다. 추상보다 감각을 추구하는 성향이 짙은 우리는 얼빠진 망상보다 눈부신 환상에 빠지고 싶다.
벌건 대낮에 'daydream (백일몽)'으로 마음을 흠뻑 적시는 성미 사나운 그 환자와 다시 'dream (꿈)'에 관한 대화를 나누려 한다. 꿈 속에서 환청증세를 경험하는 우리는 누구나 꿈을 꾸는 동안 극히 광적인 상태에 처하지만 반대로 꿈과 환상이 없는 인생이야말로 죽음에 가까운 일상이라고 힘주어 말할 것이다.
'imagine (상상하다)' 또한 고대 불어 'imaginer'에서 유래했고 워낙 꾸미거나 장식한다는 뜻이었다. 상상은 예술의 기본자세다. 상상력이 빈곤한 삶은 따분하고 기계적일 뿐만 아니라 마치 양념을 치지 않은 음식이나 진배없다.
꿈의 어원을 공부했지만 아무런 뾰족한 해답도 얻지 못한 뒤끝에 결국 내 스스로의 추론을 내세울 용기가 생겼다. '그리다'라는 말에서 그리움이나 그림이라는 명사가 탄생했듯 '꾸미다'에서 꾸밈이나 꿈 같은 명사가 탄생했다고 나는 주장한다. 영어의 꾸미다, 상상하다, 같은 말들이 공상, 환상, 망상, 꿈 같은 단어로 밀착 연결되듯이.
옛날에 장님 여섯이서 코끼리의 본질을 연구했다 한다. 그들은 제각기 손으로 코끼리를 만진다. 코를 건드리고서 뱀이라 하고 상아를 만지며 창, 귀를 잡고서 부채, 다리를 쓰다듬다가 기둥, 배에 손을 대고 벽, 꼬리를 붙잡고서 밧줄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생김새도 코끼리처럼 생긴 '코끼리 상(象)'자는 현상계(現象界)를 일컫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
상상이 가미되지 않은 생각은 전혀 화장을 하지 않은 민낯이거나 옷을 안 입은 맨몸의 썰렁함이다. 공상도 환상도 망상도 꿈도 다 우리의 원기 왕성한 상상이 만들어내는 극적인 치장과 꾸밈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원동력인 꿈에 대하여 노자(BC 604-531)의 도덕경 4장 끝부분을 빗대어 인용하면서 그 환자를 타일러 줘야겠다.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 그게 (道, 꿈, 코끼리) 누구의 자식인지 나는 모르지만 하느님을 앞서 간단다.
© 서 량 2014.3.8
-- 뉴욕중앙일보 2014년 3월 12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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