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05. 불같이 뜨거운 情이 없이

서 량 2014. 4. 6. 20:50

 2014 3월에 러셀 크로우 주연으로 개봉된 영화 '노아(Noah)'를 보았다. 카인의 사악한 후예들을 벌주기 위하여 설정된 대홍수를 음산한 표정의 노아가 신이 내린 지시대로 대처하는 과정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조명한 각본이었다. 재난영화의 어두운 장면도 인상적이었지만 구약성경의 엄숙한 기록을 멋대로 처리했다는 기독교인들의 비평 또한 높았다. 도중에 휙 지나가는 대사, "Fire destroys all. Water cleanses. (불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물은 씻어준다.)" 하는 부분이 내 의식의 수심 깊은 곳에 커다란 물기둥을 이루었다.

 

 'fire'는 이상하게도 자극하거나 흥분시킨다는 뜻이 12세기에 생뚱맞게 먼저 있었고 구체적으로 불이라는 명사는 14세기에, 총을 쏜다는 표현은 16세기에, 그리고 직장에서 해고시킨다는 의미는 19세기 중반에, 게다가 위험한 짓을 한다는 관용어 'play with fire' 19세기 말에 출현했다 한다. 양키들 모든 갑남을녀의 정신상태가 성숙하는 과정에서 너무 심한 자극이나 흥분이 위험하다는 교훈을 얻기까지 거의 700년이라는 세월을 거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처럼 언어의 변천사는 인간 두뇌발달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water'는 고대영어 'watar' 독일어 'Wasser' 등등 심지어 러시아말 'voda'에 이르기까지 거의 비슷한 발음으로 널리 통용되는 단어다. 당신이 가끔 마시는 칵테일에 잘 들어가는 보드카(vodka)도 영어가 흡수한 러시아어로 물을 뜻하는 'voda'의 축소형이다. 'Wednesday'의 첫 부분도 거의 같은 발음. 그야말로 우리말의 수()요일이다.

 

 나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분노를 불, 슬픔을 물에 비유한다. 불이 만물을 파괴하고 물이 생명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분노가 자신과 남을 손상시키는 점을 설명한다. 슬픔은 다르다. 당신은 아득한 유년기의 무더운 여름날 해수욕장에서 물장구를 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놀지 않았던가. 눈물이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킨다. 물을 좋아하는 우리는 시원한 시냇물에 발을 담그거나 올림픽 사이즈 풀장에서 힘차게 다이빙도 한다. 그러나 누구도 불 속에 몸을 던지는 짓은 하지 않는다.

 

 물과 불은 상극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를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한의학에서 몸을 덥히는 일을 하는 심장은 화경(火經)에 속하고 물을 관리하는 콩팥은 수경(水經)으로 치는데 이 두 경락은 서로를 억제한다. 고혈압에 이뇨제를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심장이 너무 왕성해지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지만 콩팥이 분주하면 화장실에 자주 가는 일에서 그치나니 음양오행설에서도 불은 건강을 상하게 하고 물은 몸의 독소를 씻어내느니라!   

 

 'firewater'는 북미 인디언이 물려준 미국영어로 독주(毒酒)라는 뜻이고 불과 물이 서로 맞물린 합성어다. ''로 끝나는 단어이기에 망정이지 불로 끝나는 말일랑 (waterfire? 용암?) 당신은 절대 가까이하지 말지어다. 

 

 꽃이 살포시 고개를 들고 산천초목에 물오르는 봄이다. 2001년 첫 시집에 발표해서 뉴욕의 신윤미가 작곡한 내 졸시(拙詩)를 흥얼거리고 싶은 계절이다.

 

 ♪ 불같이 뜨거운 情이 없이/ 사랑을 할 수 있지/ 있구말구 있구말구/ 사랑은/ 불같이 뜨거운 情에서 오지 않는다// 아득한 옛날/ 당신이 세상에 내려오기로/ 마음을 다그쳐 먹은 그 순간보다/ 훨씬 먼 옛날에/ 사랑이 피어 있었지/ 샛별이나 강변 소슬바람처럼/ 서늘하게 깨어 있었지/ 당신이 하는 사랑은/ 당신 사랑이 아니야// 불같이 뜨거운 情이 없이/ 사랑을 하지/ , 하구말구~~ 

 

© 서 량 2014.04.05

-- 뉴욕중앙일보 2014 3 26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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