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90. 리스펙트

서 량 2013. 9. 10. 19:55

 1980년대부터 흑인들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한 'dis' 혹은 'diss'라는 짧은 슬랭이 있는데 'disrespect'의 준말로서 결례하거나 무례한 짓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비라도 내리는 어느 오후쯤 눈초리 사나운 흑인이 당신에게 'Are you dissing me?'라 크게 외쳤다면 '너 날 x으로 아는 거야?' 하는 의미로 받아드려야 한다. 아무리 고운말 쓰기 운동에 앞장을 서는 당신이지만 이때 x는(은) 상대를 무시하는 우리말 속어 중에서 한 음절로 된 말을 생각해 보면 얼른 짐작이 갈 일이다.

 

 'dis-''dismiss', 'disagree', 'dishonest'처럼 접두사로만 쓰이고 독립적인 단어가 아니다. 음악에서도 고전의 화음을 깨뜨리고 흑인들이 재즈를 발전시켰듯이 말에서도 고리타분한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단어를 창조하는 사람들 또한 흑인들이다.

 

 'respect' 16세기 경 거의 같은 시기에 불어와 라틴어에 생겨난 말이면서 'look back (뒤돌아보다)'는 뜻이었다. 쉽게 말해서 're-' '다시'라는 뜻. 이를테면 'remember (기억하다)', 'remind (상기시키다)', 'review (복습하다)', 'rewind (다시 감다)', 같은 단어에 두루두루 쓰이는 're-'.

 

'respect'에서 're'를 빼고 'spect'에 몰두해 보자. 접미사로 'spect'가 들어가는 말들이 참으로 많다. 'inspect (조사하다)', 'retrospect (회고하다)', 'prospect (전망)', 'suspect (의심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스펠링은 달라도 발음이 같은 'expect (기대하다)'에 이르도록 'respect' 'spect'는 참 교묘한 말이다.

 

 양키들이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는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는 데서 싹트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이 기고만장하여 상대를 무시하는 언행을 억제하는 것이다.

 

 공식석상에서 짧은 연설이라도 할 때 어떤 사실에 '대하여'라고 당신이 무심코 말하는 'with regard to''regard'는 또 어떤가. 당신이 좋아하는 양키에게 무슨 카드를 보낼 때 'Best Regards'라고 쓰는 바로 그 'regard'14세기 중반 고대 불어에서 배려, 혹은 판단이라는 뜻이었다. 누가 당신에게 '최선의 배려'라고 말했을 때 기분이 참 좋지 않은가.

 

 배려(配慮)는 아주 어려운 한자어다. 나눌 배, 생각할 려, 다시 말해서 나누어 생각한다는 뜻으로서 영어의 'consider'에 해당하는 말이다. 14세기 말에 생겨난 이 라틴어는 일설에 의하면 상대와 함께 별을 보다 (to observe the stars together)는 뜻이었다 한다.

 

 존중(尊重)한다 할 때의 ''자는 옥편에 '높을 존', '술 그릇 준'이라 나와 있다. 더 자세하게는 '술통'이나 '목이 짧고 배가 부른 작은 항아리'라는 구절을 보고 당신은 깜짝 놀랄 것이다. 이 회의문자는 제사를 지낼 때 공손히 술병을 손에 들어 신에게 바치는 모습이라 풀이한다.

 

 양키들의 'respect'가 자신을 뒤돌아보는 겸손한 심리상태라면 중국인들의 존경심은 상대에게 술을 먹이는 매우 실질적인 접대의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respect'를 순수한 우리말로 무엇이라 할까 하고 오래 생각했지만 별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명사로 존중, 존경, 공경 같은 한자어가 있을 뿐이지만 동사로는 '고개를 숙이다', 혹은 '머리를 조아리다'는 표현이 가장 그럴 듯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는 상대방 존중을 마음이나 술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모양이다.       

 

© 서 량 2013.09.09

-- 뉴욕중앙일보 2013 9 1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