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TV 드라마 중에 '칼과 꽃'이라는 연속극 제목이 눈길을 끈다. 1980년도 중반에 햇볕 밝은 칼리포니아에 나타나 미국을 휩쓴 하드록 밴드 이름 'Guns N' Roses'를 연상시키는 타이틀이다. 미국의 '총과 장미'와 한국의 '칼과 꽃'은 둘 다 위기감과 부드러움의 이미지가 잘 어우러지는 발상이다.
노르웨이 신화에 나오는 북구의 신(神) 오딘(Odin)의 시녀들 중에 전쟁터에서 죽은 영혼들을 신의 전당 발할라(Valhalla)로 데려가는 일을 맡은 'Gunnr'라는 여사자(女使者)가 있다.
인류가 사용하는 무기로서 금속으로 제조된 총알의 전신은 돌이었고 돌이야말로 당신과 나의 까마득한 선조들이 처음으로 사용한 유일무이한 석기시대의 전쟁 도구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14세기 중엽에 전쟁터에서 쓰이던 거대한 투석기(投石器)를 'Gunhilda (Gunnr + Hilda)'라 불렀고 나중에 스펠링이 생략되어 'Gunilda'로 변했다. 'Hilda'는 노르웨이 말로 전쟁이라는 뜻으로서 영어권에서 흔하게 쓰이는 여자 이름이고 'Gunilda'도 서구의 족보에 당당하게 등록된 옛날식 여자 이름이다.
어쨌든 투석기, 'Gunilda'에서 총기라는 의미의 현대영어 'gun'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 어원학적 정설이다.
남자들의 전유물인 총(gun)이 햇살 희미한 북구의 여자 이름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을 언어학자들은 짐짓 눈을 내리깔고 진술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논리의 비약을 거쳐 한 나라의 무력을 상징하는 핵무기의 심층심리에 여성(女性)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밝혀야 한다.
칼로 적을 살해하는 행동이야말로 걸핏하면 과녁에서 빗나가는 돌 던지기 싸움보다 더 진화된 방법이었다. 그렇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듯 상대를 해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가까이 가야 한다. 그래서 칼에는 다분히 촉각적인 뉘앙스가 있고 총은 상대와의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해도 좋으므로 멀고 싸늘하고 냉철한 수법이다.
어찌 보면 칼질이 총질보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를 좁힌다는 뜻에서 비록 파괴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인간적인 행동이랄 수 있다. 내친김에 말하지만 흑인들이 선호하는 무기는 단연 칼이다. 총기를 구입하기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미국에서 아직도 그들이 곧잘 사용하는 무기가 칼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그들의 인간에 대한 친화력이 얼마다 강한지 인정을 해야 될 것 같다.
순수한 우리말인줄로 알았던 '칼'은 할복자살(割腹自殺) 할 때처럼 베고 자른다는 뜻의 한자어 '할(割)'에서 왔다는 것을 배웠다. 칼 중에도 양쪽에 시퍼런 날이 선 칼을 검(劍)이라 하고 날이 한쪽으로만 난 칼을 도(刀)라 하느니라. 요리를 할 때 쓰는 도마의 '도'도 칼 도(刀)일 것이라고 유추한다.
더위를 잊기 위하여 납량 특집적 공상에 빠진다. 내 환자 중 한 사내가 심각한 오해를 품고 내게 접근한다. 그는 적당히 계산된 거리에서 총을 겨누지 않고 일자 무식하게 손에 식칼을 들고 내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온다. 나는 암캐를 들먹이는 욕설보다 훨씬 여유 있고 완곡하게 'Son of a gun!'이라 소리친다.'이 녀석아' 정도의 이 막말은 19세기 중엽에 영국 해군들이 쓰기 시작했고 원래 대포가 즐비한 군함의 갑판에서 태어난 아비를 알 수 없는 남자아이를 뜻했다.
공상의 막바지에서 나는 상대가 언어에 민감한 놈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그리하여 '야, 너는 2006년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슬랭, 'guns'가 여자의 커다란 젖가슴이라는 걸 아느냐? 하며 동양인 특유의 정중한 말투로 속삭이는 2013년 7월 말이기도 하다.
©서 량 2013.07.30
-- 뉴욕중앙일보 2013년 7월 3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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