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phabet'은 16세기말경 'A'와 'B'의 희랍어 발음 'alpha'와 'beta'가 합쳐진 후 말미의 'a'가 생략된 말이다. 이것은 마치 속어로 우리의 글자를 '가나다라'라 부르는 것과 크게 다름없는 이치다.
인류가 처음으로 글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 3,4천 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5,6천 년 전 이집트의 상형문자(象形文字) 시절이란다. 서거정(1420~1488)이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주장했듯이 기원 전 2333년에 건립된 단군왕검의 고조선 시절보다 얼추 천여 년 전 일이다. 그 비슷한 시기에 중국인들은 거북이의 배딱지에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새겨 넣었다. 종이가 없던 시대라 중국인들이 문자를 발명한답시고 애꾸지 거북이의 배를 칠판 삼아 그림 그리기를 연습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기원 전 천 년 경 지중해 연안의 페니키안(Phoenician) 문명으로 넘어갔다가 고대 희랍어와 라틴어로 변한 것이 영어 알파벳의 시초다. 그리고 인류역사상 가장 과학적이라 칭송 받는 한글을 1443년에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우리 세종대왕이 창시하셨다.
페니키안 알파벳은 표음문자(表音文字)인 한글과 달리 그림을 보는 기분이 은근히 든다. 지중해 연안이건 넓은 중국 땅이건 옛날 사람들의 의사소통은 청각보다 시각적 정보에 의존했던 것이다.
페니키안 문자의 'A'는 소(牛: ox)라는 뜻이었고 지금도 잘 보면 뿔 달린 소로 보인다. 'B'는 생김새대로 집을(house) 의미했고 'C'는 당시 사냥할 때 쓰던 막대기(throwstick)를 닮았다. 생김새가 낙타 모습이라는 학설도 거론됐지만 'C'는 이집트 벽화에 건장한 사내가 손에 쥐고 휘두르는 약간 구부정한 그 잘 알려진 막대기 모습 그대로다.
그들의 알파벳에는 소가 집보다 먼저 등장한다. 설마 소를 방안에서 키웠을 리가 없었기에 텍스트 중 맨 첫 번째 관심사는 집 밖에 우두커니 서있는 소였으며 그 다음이 내부적 여건이 풍성한 집이었다. 천자문 시작에서도 하늘 천(天), 따 지(地)같이 머나먼 하늘이 사람이 발을 디디고 선 땅을 앞지른다. 문자의 역할이 한 인간의 독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와의 교류를 위한 도구였으니 이것은 그야말로 뻔할 뻔자다.
한자의 내 천(川)자가 냇물을 뜻하듯이 얼른 보기에도 모양이 그럴 듯 한 'E'는 페니키아 사람들에게 창문(window)을 뜻했다. 일설에 의하면 애초에 'E'는 '기쁨'이라는 뜻이었다 하니 환희의 소재를 창문 밖에 두었던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훤히 드러난 셈이다. 가수 조용필의 가창력이 철철 넘치는 그리움의 표적은 집안의 여자가 아닌 '창 밖의 여자'였던 것을 당신은 기억하는지.
'K'는 무언가 잡으려 하는 모양의 손(hand)을 의미했다. 그것은 무엇을 움켜쥐려 하는 서구적 공격성을 시사한다. 'king(왕)', 'knight(기사)', 'kick(발로 차다)', 'kill(죽이다)', 그리고 저 위대한 인간의 두뇌활동이 출발하는 'know(알다) 같은 단어들이 다 'k'로 시작된다. 우리 막강한 'Korea'도 'k'자 돌림이다.
페니키안 알파벳은 8세기경 아테네와 로마를 거쳐 영어 텍스트의 원조가 됐다. 그리고 장장 반만 년이 지난 작금의 알파벳 또한 한글처럼 완벽한 표음문자로 군림한다.
그렇다. 현대처럼 바쁜 세상에 상형문자나 다름없는 표의문자(表意文字)를 쓰면서 글자 하나하나를 그림 그리듯 기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표음문자 만세! 시각의 시대가 거(去)하고 청각의 시대가 래(來)했도다. 뭐? 근데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독자가 텍스트를 읽는 일은 오로지 시각적인 활동이라고?
© 서 량 2013.06.17
-- 뉴욕중앙일보 2013년 6월 19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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