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8일 한국 인터넷은 보스턴 테러 이틀 만에 텍사스에서 터진 대형 폭발사고 때문에 미국이 '패닉' 했다는 기사를 띄웠다. 무서움에 떨었다고 쉽게 말하는 대신 꼭 그렇게 영어를 한글로 옮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작금의 추세다.
'panic'은 1708년부터 '집단공포'라는 뜻으로 쓰였다. 이 말은 목신(牧神)을 지칭하는 고대 희랍어 'Pan'에서 생겨났다. 목신이란 사람 얼굴에 염소의 뿔과 다리를 가진 좀 흉측해 보이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신이다.
'Pan'은 기독교가 대두하기 훨씬 전 가지각색의 신들이 봄철 나비떼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던 시절에 숲과 들판을 맡아 주관하던 존재였다. 목신은 목동(牧童)들에게 곧잘 공포심을 일으켰다 한다. 인적이 끊어진 숲길이나 벌판에 음산하게 휘몰아치는 원시의 바람 소리를 당신도 한 번 상상해 보라.
목자(牧者) 혹은 목사(牧師)를 영어로 'shepherd'라 하고 우리의 진도 개처럼 영특해서 양떼를 잘 몰기로 소문난 독일산 개 '셰퍼드'는 목양견(牧羊犬)이라 어렵게 부르기도 한다. 옥편에 '칠 목(牧)'은 '소 우(牛)'와 '칠 복(攵)'의 뜻이 합쳐진 회의문자라 나와있다.
'글월 文'처럼 보이면서 어찌 보면 '계집 女'같이도 보이는 '칠 복(攵)'자는 문자 그대로 치고, 때리고, 채찍질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옛날 중국인들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나 여자를 대할 때 소를 다루듯 치고, 때리고, 채찍질을 했다는 학설이 가능하다.
관할구역이 자연인지라 목신(Pan)에는 '모든'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panacea'는 만병 통치약이고 'pandemic'은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퍼진다는 뜻이며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모든 악마들이 들끓는'아수라장'을 'pandemonium'이라 한다.
911 테러건 보스턴 테러건 테러라는 영어는 이제 우리의 일상용어가 됐다. 'terror'는 전인도 유럽어로 부들부들 떤다(shake)는 뜻의 'tre'에서 생긴 말이다.
그러므로 나나 당신이 급격한 공포를 느꼈을 때 전신이 시쳇말로 후덜덜 떨리는 것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나뭇가지가 부르르 흔들리는 현상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나무와 한 통속의 생명현상이다. 그리고 끔찍하다는 뜻의 'terrible'도 같은 말 뿌리의 소산이다.
1888년부터 쓰여온, 근래에 뉴요커들이 잘 쓰는 속어, 'Terrific! (훌륭해!)' 또한 좀 생각해 봐야 하는 말이다. 얼른 듣기에 아주 기분 좋은 이 감탄사에는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친다는 뜻이 속에 도사리고 있다.
이러다 까딱 잘못하면 마음 깊은 속 어디에선가 우리는 테러를 선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허기사 우리도 좋다는 뜻으로 '죽여 준다'는 비속어를 쓰기로서니 이것은 도대체 양키들이나 우리나 똑같이 피학대증(masochism)을 추구하며 산다는 말인가. 때때로 민중이 독재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시방 남의 얘기가 아니다. 보스턴이건 텍사스건 다 때려치우고 우리 한국에 대한 걱정을 해볼까 하는데… 요즘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남한과 미국에게 핵 미사일을 쏘겠노라 도발협박을 하는 북한의 작태가 몹시 불쾌하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미국이 '패닉' 했다는 인터넷 기사가 뜬 같은 4월 18일에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을 거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You don't get to bang your spoon on the table and somehow you get your way." -- 물론 이건 밥상머리에서 숟가락을 집어 던지면 지 뜻대로 될 줄로 알고 계속 '뗑깡'을 부리는 저 철딱서니 없는 북한의 김정은을 두고 한 말이다.
© 서 량 2013.04.22
-- 뉴욕중앙일보 2013년 4월 24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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