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저러블'을 보았다. 20살에 첫 시집을 출판한 빅토르 위고가 60살에 탈고한 서사적 장편소설을 충실하게 옮겨 놓은 영화였다.
어릴 적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소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인상에 남는 대목은 마들레느 신부가 경찰이 잡아온 장발장 앞에서 은식기를 선물로 줬다고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다.
신을 대변하는 신부가 거짓말을 하다니. 이건 도무지 무슨 의미일까 했더니 진실이 휴머니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빅토르 위고는 낭만파의 거두로 우리에게 힘차게 군림했다.
'miserable'이라는 형용사 단어의 뿌리는 'miser'에 있다. 시방 말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라 'miser'는 '미저러불'한 사람이라는 뜻. 1540년에 생긴 이 말은 라틴어로 비참하고 불행하고 저주받고 불쌍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탄생한지 20년 정도 지난 다음 '마이저'(miser)라는, 문자 그대로 스펠링이 다섯 밖에 안 되는 이상한 단어는 어느 사이에 '구두쇠'라는 뜻으로 변절된 것이다.
구두쇠처럼 비참한 인생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스쿠르지'와 우리의 설화에 나오는 '자린고비'가 설핏 떠오르는 말이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해가 1789년이었다.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이 이루어진 해는 바야흐로 1832년 6월 항쟁 때였다. 그 해 유럽에는 콜레라가 발생해서 문자 그대로 거리에서 죽어간 사람들만 자그마치 만 팔천 여명이라고 역사는 기록한다.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마치 우리의 춘향이와 이도령처럼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첫눈에 격하게 사랑에 빠진다. 어린 남녀가 상대를 알아보고 미친 듯이 서로를 탐하는 장면을 좀 유치하지만 여기에 소개한다.
-- 그들은 서로 상대편의 마음 속을 알아채고, 서로 매혹하고 서로 황홀해 했다. 다 끝났을 때,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을 때,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올려 놓고 물었다. "이름이 뭐에요?" 내 이름은 마리우스. 당신 이름은?" 하고 그는 말했다. "내 이름은 코제트." --
장발장, 하면 또 자베르 경감을 빼 놓을 수 없다. 그야말로 관료적인 양심과 치밀함을 대변하는 존재. 그는 자기의 직함을 훌륭하게 실천에 옮기는 역할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장발장과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환희를 더더욱 돋보이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피력했듯이 선(善)은 악(惡)의 힘을 빌려서 우리의 정신생활을 인도한다.
자베르는 자기의 소임을 끝낸 후 세이느 강에 투신자살한다. 그 장면이 내 콧날을 시큰하게 하더라니. 프랑스 혁명과 요즘의 한국 세태를 연결해서 생각한다. 우리는 왜 혁명을 갈망하는가. 대충 같은 뜻으로 쓰이는 'revolution', 'reform', 'renew' 또는 'repair'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요컨대 하나같이 're-'라는 접두어가 들어가는 단어들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re-'는 '다시'라는 뜻. 그래서 'reaction', 뿐만 아니라 'ready', 'real', 'reach' 같은, 우리가 평소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말들이 시시때때 말 속에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2012년에 박근혜나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극구 주장하는 '쇄신', '변혁', 혹은 '개혁' 같은 소위, 현재상태를 바꾸고 싶은 심리상태란 무언지 다시 새롭게 해 보겠다는 집단적 심리작용의 발로다.
늘 역사는 다시 시작된다. 새해에는 마음 속 깊숙이 품은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에 강렬한 에너지로 기성체제에 덤벼드는 인간의 반항기질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겠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지만 꼭 그렇게 한참 비참해져야만 개혁을 시도하는 우리의 이상한 습성에 대하여.
© 서 량 2012.12.30
-- 뉴욕중앙일보 2013년 1월 2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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