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70. 죄의식, 혹은 부끄러움

서 량 2012. 12. 4. 12:55

일주일에 두 번 정신병동 환자들에게 강의를 하는 일정 중 얼마 전에 '양심'을 화제로 삼은 적이 있다. 양심을 전문용어로 'superego'라 하는데 우리말로 '초자아'라 번역하고 사람 마음 속에 내재하는 도덕성을 얼추 뜻한다.

 

칠판에 'superego'라 써 놓은 후 'super' 부분에 밑줄을 긋고 무슨 뜻이냐고 묻자 누군가 "Superman!"이라 소리친다. 나는 호들갑을 떨면서 'superego' 'ego'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품이라며 응답자를 추켜준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심리를 크게 세가지 요소로 구분한다. 자아, 초자아, 그리고 본능에 해당되는 이드(id)로 이루어진 마음의 '삼총사' 중에서 자아는 가장 고생스러운 팔자를 타고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자아는 본능과 도덕과 현실이라는 아주 혹독한 세 주인을 섬기는 숙명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중세 라틴어로 'ego''I()'였고 'id'는 현대영어와 스펠링도 비슷하게 'it(그것)'이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테두리에 갇힌 채 겉으로는 예의와 격식을 차리면서 내심 '그것'이라 불리는 터무니 없는 본능의 시련을 겪는다.

 

초자아가 엄격한 도덕률로 자아를 압박하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라며 당신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니다. 초자아라고 해서 꼭 그렇게 까칠하지는 않다. 왜냐면 천둥벌거숭이 같은 우리의 본능을 자아가 잘 추스리도록 초자아는 도우미 역할도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자아를 굳이 한국의 근엄한 검찰청에 빗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양심을 'conscience'라 한다. '함께'라는 뜻의 'con' '과학'이라는 의미 'science'가 합쳐진 말이다. 'science'는 워낙 13세기경 불어와 라틴어로 지식이라는 뜻이었고 17세기에 '자연과학'이라는 말이 돼버렸다. 어원학적 차원에서 보면 양키들의 양심은 사물의 이치를 함께 아는 데서 탄생한 셈이다.

 

양심의 첫 글자 '어질 량()'을 옥편은 좋은 곡식을 골라 내기 위한 농기구를 본뜬 상형문자로서 '좋다'는 뜻이라 풀이한다. 이 글자는 어릴 적 가을 철에 시골 고향집 앞마당에서 작동하던 탈곡기 모양이다. '어질다''마음이 착하며 슬기롭고 덕이 높다'는 뜻이니 우리의 양심은 지적(知的)이라기보다 단연 너그러운 정서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신경안정제를 과도하게 복용하는 환자들에게 나는 양심을 법정의 판결에 비유하면서 그나저나 옳고 그름의 결론은 누가 내리냐고 질문한다. 몇몇 환자는 끄떡끄떡 졸고 있다. 그때 스물 몇 살 밖에 안 되는 초록색 눈동자의 백인여자가 진실과 허위에 대한 정답은 신이 결정한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나는 다시 'conscience'의 글자풀이로 돌아가서 우리의 도덕성은 서로간에 합리적인 지식을 공유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서구적인 지성은 죄값을 에누리하기 위한 다변(多辯)을 요구한다. 신의 명령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후예들이 원죄의식을 벗어나려고 랩(rap) 노래를 부르듯 숨가쁘게 설명하고 구질구질하게 변명한다.

 

우리의 동양적 양심은 부끄러움에서 생겨난다. 부끄러운 사연을 떠들썩하게 고백하지 않는 동양인들은 얼굴을 붉히면서 조용히 반성할 뿐이다. 법정에 출두하여 교묘한 진술을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속을 썩히는 우리의 심리습관이다.

 

45분이 후다닥 지나간 강의 끝 무렵에 질문이 있느냐 했더니 한 늙수그레한 흑인남자가 손을 번쩍 들고 "나는 언제 퇴원합니까?" 하며 묻는다. 그것은 양심과 부끄러움의 위력이나 혜택보다 무모한 자유를 갈망하는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질문이었다.

 

© 서 량 2012.12.3

-- 뉴욕중앙일보 2012 12 5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