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온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 어느 병원의 '캬파'가 미달이라는 말을 들었다. 얼른 이해를 못했지만 앞뒤 문맥으로 보아 그 친구가 'capacity (능력, 수용력)'이라는 단어의 첫 부분을 잘라서 말한 것 같은데 이국적인 발음 티를 내기 위하여 '캬파'라 발음한 것 같다. 옛날 어릴 적 유리잔(glass)을 누가 '카라쓰'라 발음했을 때 멋지다고 느꼈던 기억이 떠올라서 속으로 픽 웃었다.
우리는 영어를 썩둑 잘라 말하기를 좋아한다. 'negotiation(흥정)'을 '네고', 'coordination(옷을 조화 있게 차려 입기)'을 '코디' 그리고 'remote control'을 '리모콘'이라 한다.
우리말도 잘라 말한다. 비좁은 전철 안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남자를 '쩍벌남'이라 하고 여자가 양다리를 쩍 벌리고 야하게 추는 춤을 '쩍벌 댄스'라 한다. 그렇게 우리는 두 나라 언어를 혼합해서 짧게 말한다.
소개팅, 번개팅 같은 팅자 돌림도 있다. 팅은 'meeting'의 두 번째 음절인데 이쯤 되면 사람을 만나러 갈 때 누구를 '팅'하러 간다 해야 되는 건가.
달걀프라이도 우리말과 영어가 조합된 혼혈어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아다오. 나는 지금 우리말의 순수성을 주장하기보다 우리 언어생활의 다양성과 포용력에 '포커스'를 맞추려는 심사일 뿐. 초점이라 하지 않고 포커스라 하니까 좀 현대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roast beef'를 로스구이라 하는 것도 혼동스럽다. '로스'는 'roast'(구이)를 짧게 하는 말이니까 로스구이를 '구이구이'라 해야 되지 않을까. 그리고 'pork cutlet'는 돼지고기를 잘게 쓸었다는 뜻, 우리말로 '돈까스'라 한다. 이때 '까스'는 'cutlet'의 일본식 발음이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어찌 '컷렛'을 '까스'라 하는가.
상대의 용기를 북돋우는 표현, '파이팅'도 문제다. 멀쩡한 사람에게 아닌 밤중에 싸우라니. 이 말은 이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전운이 기울던 시기에 자살특공대 가미가제 요원들이 비행기를 타기 전에 '화이토(fight)'라 소리치며 '천황만세'를 부르고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허기사 '싸우자'를 모국어로 말하는 대신에 당시 적국의 언어인 영어로 하는 놈들이나, '힘내라'는 표현을 일본식으로 싸우라고 부추기는 우리들이나, 사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이다. 근데 '파이팅'을 '화이팅'이라 발음하면 'whiting(대구)'라는 영어가 된다. 생선장수도 아닌 당신이 야구경기에서 냅다 흥분하면서 '화이팅', '화이팅' 하면 그건 '대구', '대구' 하며 소리치는 거다.
우리는 코미디언을 '개그맨(gagman)'이라 한다. 영어사전에 없는 우리들만의 영어다. 'gag'에는 개가 사람을 물지 못하도록 입에 씌우는 재갈이나 함구령 같은 본래 뜻에서 파생된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농담'이라는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쉽게는 '구역질'이라는 뜻이다.
'개콘'이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자칫 욕하는 소리로 들리는 이 말은 개그 콘서트(gag concert)의 준말이란다. 우리말에 '개'자가 들어가면 어쩐지 사람을 긴장시킨다. 뭐? '구역질 음악회'?
어느 속눈썹이 짙은 한국여자가 자기 친구에게 이런 대화를 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라. "엊그제 소개팅에서 돌싱남을 만났는데 그 사람 아주 간지가 있더라, 얘."
'간지'는 요새 우리 영어의 필(feel)에 해당되는 일본말이다. 우리는 왜 멋지다는 표현을 마다하고 일본말을 들먹이는지 모르겠다. 이거 혹시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깊숙이 뿌리 박힌 당신과 나의 '곤조(根性)'는 아닌가.
© 서 량 2012.11.20
-- 뉴욕중앙일보 2012년 11월 2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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