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기 전에 2012년 런던 하계 올림픽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야겠다. 대한민국이 메달 순위 종합성적으로 전 세계 205 국가들 중에 미국, 중국, 영국, 러시아 다음으로 5등을 했다는 기쁨에 또다시 흠뻑 취하고 싶다.
막판에 축구 4강전에서 일본을 이긴 태극전사들의 환호성의 짜릿한 감흥을 잊을 수 없다. 유도와 여자 태권도와 체조 같은 종목에서도 우리 선수들의 활동이 눈부셨지만 나는 유독 양궁과 사격과 펜싱에 눈길이 갔다.
양궁(洋弓)이라는 어려운 한자말을 영어로 'archery'라 한다. 이 말은 13 세기경 고대 불어의 'archier'와 라틴어의 'arcus'에서 유래했다. 활처럼 생긴 아치형의 다리나 건축구조를 뜻하는 'arch'도 같은 어원에서 왔다. 일직선의 화살과는 달리 반달이나 눈썹 모양인 활은 어딘지 여성적인 느낌이 든다. 화살이 과녁을 명중시키는 묘기는 활줄과 시위의 부드러움이 극도로 긴장하는 힘의 결과다. 여자 양궁 단체전에서 장장 28년에 걸쳐 7연패의 금메달을 획득한 우리 한국 여성들이 자못 사랑스럽다.
사격(射擊)을 싱겁게도 'shooting'이라 한다. 이를 테면 'shoot the breeze (산들바람을 쏘다?)'는 잡담을 한다는 뜻이고 그냥 ‘Shoot! (쏴!)’하면 누가 할말이 있다고 할 때 '말해 봐!' 하는 슬랭이다. 이 표현은 근래의 우리 속어로 ‘오늘은 내가 쏜다’가 회식비를 자신이 지불하겠다는 의미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축구에서 ‘골인’하기 전에 공이 쏜살같이 날아가는 동안 중개자가 “슈읏”하고 소리치는 순간도 사뭇 통쾌하다. 어떤 물체가 목표물에 도달하는 장면에는 은연중 성적인 암시가 들어간다. 남녀간 육체관계의 어느 시점에서 ‘Did you come?’ 할 때처럼 양키들은 ‘왔다’는 개념을 쓰지만 우리는 속어로 ‘쐈다’고 하는 점도 흥미롭다.
펜싱 종목에서 본 대한민국의 개인전과 남자 단체 팀의 활약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펜싱을 순수한 우리말로‘칼 싸움’이라 옮길까 하다가 잠시 주춤한다. 왜냐하면 ‘fencing’은 ‘gun fight (총 싸움)’에서처럼 상대를 치명적으로 해치는 뜻보다는 자신을‘defense (방어)’한다는 뉘앙스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펜싱은 14세기 초엽에 자기 방어, 즉 ‘self-defense’와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았고 1580년대에 들어서야 ‘sword fighting (칼 싸움)’이라는 뜻이 파생됐고 급기야 1620년에 ‘fence’는 도둑의 침입을 막는 ‘담’이라는 뜻으로도 변했다. 그래서 사격에 비하여 펜싱은 여성적이기도 하다. 한국 여자들의 살림 잘하는 기질이 펜싱을 잘하는 재능으로 진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혼자 해 보았다.
일본을 패배시키고 우리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의 영광을 차지한 축구이야기도 해야겠다. ‘soccer’는 워낙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Football Association’의 뒷글자를 약자로 ‘Assoc.’라 하고 거기에 ‘~er’을 붙인 후 ‘a’ 발음을 생략한 말인데 역사상 정식으로 체계를 갖춘 스포츠로는 단연 영국이 종주국이다. 그 영국을 이번에 연장전을 거쳐 승부차기로 5대 4로 우리가 당당하게 이긴 것이다.
‘Alive and kicking’이라는 관용어가 있다. 자궁에서 태아가 발길질을 하듯 사람이나 사물이 펄펄 살아있다는 표현이다. 직장 친구가 ‘Koreans are alive and kicking!’이라 하는 말을 들었다. 대한민국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여, 부디 원기 왕성하게 번성하라. 그리하여 우리 대한민국의 체력과 노력의 결실을 세계만방에 과시하라.
© 서 량 2012.08.26
-- 뉴욕중앙일보 2012년 8월 27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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