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60. 아는 자와 좋아하는 자와 즐기는 자들

서 량 2012. 6. 25. 08:09

수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모님에게 좋은 선물을 드렸더니 뭘 이런 걸 가져왔니 하시길래 "제 쾌락입니다," 하며 공손히 말씀 드리고 나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것은 머리 속으로 어느 양키가 내게 'Thank you'라 말했을 때 'My pleasure'라고 응답하는 장면을 영어로 생각을 하고 난 다음 급하게 한국말로 번역을 한 결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말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이었고 이중언어에 시달리는 사람이 저지른 가소로운 실언이었다. 턱수염을 알맞게 기르고 지체 높은 옛날 사람 역할을 맡은 드라마 배우처럼 "뭘요, 제 낙()이 옳습니다."라 했더라도 좀 낫지 않았을까.

 

엊그제 우연히 공자의 말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라는 말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무엇을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는 명언이다.

 

이런 말은 순수한 우리말보다는 목을 뻣뻣하게 곤두세우고 한자로 해야 폼이 나는 법. 그래서인 나 또한 "제 기쁨입니다"라 하지 않고 이모님에게 "제 쾌락입니다"라며 묵직한 한자를 쓴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부터 무엇을 안다는 것은 일종의 저주였다. 오죽하면 영어 속담에 'Ignorance is bliss' (무지는 축복이다)라 했고 우리말로도 '모르는 게 약이다'라 하지 않았던가.

 

알 지()에 대하여 조사해 봤다. 물론 한자어. ''는 화살 시()와 입 구()와의 합자다. 화살이 활을 떠나듯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그렇게 말이 빠르게 입을 떠난다는 의미란다.

 

좋을 호()도 문제라면 문제다. 여자가 아들과 함께 있으면 그게 바로 양키들이 말하는 'good'에 해당하는 우리의 기분이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결국 종족보존을 위한 인간의 동물적 성향을 지칭하고 있다. 당신과 내가 추구하는 인류의 행복이 기껏 여자가 아들을 잉태한 결과에서 그치는가. 딸 하나만 달랑 출산한 여자는 어쩌라는 말이냐.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만류의 영장인 당신과 내가 종족보존의 쾌락에서 멈추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 그렇다면 공자가 지적한 낙지자(樂之者)는 어떤 심성을 뜻하는가.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즐겨찾기'에 입력해 놓은 당신도 '낙지자'인가.

 

락(낙,)즐긴다는 말 외에 악기를 연주 하다는 뜻의 '악'이기도 하다. 나무() 위에 음악(音樂)을 만들어내는 꽹가리 소리, 당신과 나의 사랑보다 더 애절한 해금 가락이 흐느끼는 소리하며. 동서 고금의 절묘한 악기들이 우리 모두의 감성을 파고든다.

 

쾌락이나 기쁨에 가장 가까운 영어는 'pleasure'. 'pleasure' 12세기경 고대 불어의 'plaisir'와 라틴어의 'placere'에서 유래된 말이다. 저 감미로운 프랑스 노래 '사랑의 기쁨 (Plaisir d'Amour)' 시작 부분은 늘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때 내가 이모님에게 "저의 쾌락입니다" 라고 말씀 드린 것에 대하여 약간 부끄러운 심정이기는 하되 더 이상 후회는 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면 그날 따라 이모님이 참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고 환하게 웃으시는 순간 기쁨의 파장이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pleasure'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please'라는 간투사가 있다. 자칫 '제발'이라 번역되는 단어다. 이를테면 당신의 사생활을 십분 존중하는 내가 어느 비 내리는 저녁 당신의 방문을 노크한 다음 'May I come in?'이라 물어 봤을 때 'Please!'라는 대답이 나오는 극적인 장면에서 내가 그 대사를 '제발'이라고 번역해야 되겠는가.

 

© 서 량 2012.06.24

-- 뉴욕중앙일보 2012 6 27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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