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는 6.25 전쟁 이후 동무라는 말을 들으면 얼핏 인민군을 연상하고 마음이 섬찟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동무보다는 친구라는 말을 훨씬 자주 쓴다.
호주인들 입에 붙은 'mate'는 원래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배우자나 짝이라는 의미다. 그런가 하면 'comrade'는 공산당원들이 곧잘 애용하는 단어로 동지라는 뜻이지만 중세 불어 'camarade' (방을 같이 쓰는 사람)에서 유래했다. 동지끼리는 같은 방을 쓰는 모양이다.
'friend'는 고대영어의 'freogan'의 현재진행형 'freond'가 변화한 말로서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뜻인데 'freo', 현대어의 'free'와 말의 뿌리가 같다. 진작부터 자유를 사랑하는 서구적인 힘과 발랄함이 넘치는 말이기도 하다. 프렌드는 갑갑한 결속관계라기 보다는 자유로움에 바탕을 둔 것 같다.
친구(親舊)는 옥편에 '친할 친', '옛 구'라 나와있다. 우습게도 친하다는 말을 설명하는데 친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다니. 차라리 '가까울 친'이라 하는 건 어떤가. 'friend'의 즉각적인 좋아함에 비하여 우리의 친구라는 개념에는 오랜 세월을 가까이 지내왔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오죽하면 오랜 된 친구를 불알친구라 하겠는가. --'friend'가 맛있는 겉절이라면 친구는 군내가 풀풀 나는 묵은지와도 진배없다.
당신은 오래 전에 몇 번을 탐독한 앙트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1943)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기억할 것이다.
여우는 어린 왕자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제발-- 나를 길들여 줘!" 여우가 말했다./ "그러고 싶어, 무척," 어린 왕자는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많지 않아. 친구를 찾아야 하고, 또 이해해야 할 것도 상당히 많아."/ "누구나 자기가 길들인 것밖에는 이해하지 못해." 여우가 말했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 것도 이해할 시간이 없어. 그들은 가게에서 미리 만들어진 물건을 사지. 그렇지만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친구가 없어. 친구를 갖고 싶으면 나를 길들여 줘..."/ "너를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돼?" 어린 왕자가 물었다./ "대단한 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처음에는 나한테서 조금 떨어져서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야 해. 내가 곁눈질로 너를 봐도, 너는 아무런 말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그러나 너는 매일 조금씩 내게 더 가깝게 앉을 거야…"
역시 어린 왕자와 여우가 서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대단한 참을성과 묵묵한 시간의 흐름이 있어야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호감을 갖는 정황은 그리도 오랜 세월을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에게 금세 정이 쏠리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스페인어로 'amigo'도 상냥하다는 뜻의 라틴어 'amicus'에서 유래했고 같은 말에서 'Amy'라는 고운 여자이름도 생겼다.
'friend'에서 'r'을 빼버리면 'fiend'인데 '악마' 혹은 '적'이라는 뜻이다. 일부 어원학자들에 의하면 친구나 적이나 그놈이 그놈,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인간관계에 얽히고설키는 우리가 아니던가.
'boyfriend' 와 'girlfriend'를 우리말로 남자친구, 여자친구라 번역하는데 차제에 나는 에헴, 소년친구, 소녀친구라 하기를 극구 주장하는 바이다. 남친, 여친도 싱겁게 들린다. 왜냐하면 남녀의 사랑이란 순수무궁한 어린 나이로 돌아가는 정신상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퀴퀴한 묵은지보다 신선한 겉절이를 더 좋아하는 당신일지도 모른다.
© 서 량 2012.09.24
-- 뉴욕중앙일보 2012년 9월 26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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