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62. 어둠 속 영웅들

서 량 2012. 7. 23. 20:12

'hero'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는 뜻의 라틴어와 희랍어 'heros'에서 유래한 말로서 14세기 말에 초인간적 힘과 용기를 가진 '영웅'을 지칭했고 17세기 끝 무렵에는 연극이나 소설의 남자주인공을 의미했다여자주인공은 'heroine'이라 하는데 마약 진통제 헤로인(heroin)과 말의 뿌리가 같다는 학설이 있다헤로인에서 오는 행복한 기분이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에게 주는 기쁨과 비슷한 모양이다.

 

 'antihero'는 반영웅(反英雄)을 뜻한다어둠이 짙을 수록 빛의 역할이 두드러지듯 영화에서도 악역이 판을 칠수록 영웅의 행동이 각광을 받기 마련이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힘을 합쳐서 악당을 이겨내는 테마가 모든 스릴 만점 스토리의 주축이다이를테면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성춘향이 알뜰살뜰한 사랑의 힘으로 변사또를 이겨내는 이야기나 뱃맨(Bat Man)에서 브루스 웨인이 캣우먼(Cat Woman)과 합세하여 '반영웅베인(Bane)을 퇴치하는 장면이나 그 구성의 골격은 늘상 재미가 깨소금인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브루스 웨인은 가상의 뉴욕시 고썸(Gotham)을 핵무기의 위협에서 구출한다뱃맨은 악을 극복하는 우리의 주인공임과 동시에 당신과 내가 염원하는 뉴욕의 영구한 희망이다.

 

 2012 7 20일로 접어드는 자정을 좀 넘어 콜로라도주 오로라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The Dark Knight Rises'를 개봉하는 한 영화관에 24살의 제임스 홈즈라는 백인 청년이 뛰어들어 총기를 난사하여 관객 12명을 죽이고 58명에게 부상을 입혔다그는 수개월에 걸쳐서 총기를 수집했고 6천 몇 발의 총알을 준비한 살인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이름 중에도 악명을 남기는 악당들의 심리에는 영웅이 되지 못할 바에야 '반영웅'이 돼서라도 명성을 떨치겠다는 야비한 속셈이 도사리고 있다이들은 인생의 악역을 맡겠다고 자청한 자들이다.

 

 살인의 동기의식에는 살인강도에서처럼 물건에 대한 욕심 때문이랄 수도 있고 누구에게 앙심을 품고 통렬한 복수를 하는 이유 따위가 있을 수 있다쌓이고 쌓인 향방 없는 분노가 돌발적으로 폭발하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그러나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프로젝트에 몰두하는 인간의 심층심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맨해튼 같은데 젊은 애들이 잘 드나드는 레스트랑에 한번 가 보아라남녀가 같이 식사를 하러 들어와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냉담한 표정으로 저마다의 아이폰을 만지작거린다. 이들은 일견 공존하는 듯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제각기 멀리 떨어져 독존하고 있는 것이다그들의 대화는 가장 기본적인 언어습관을 제외하고는 이미 단절 된지 오래다.

 

 망망한 사이버 스페이스를 수시로 방황하는 우리는 서로에게 왕따 당한 외톨박이들이다. 영웅들이 측근자들과 어울려 생을 찬미하는 동안 서슬이 시퍼런 반영웅들은 밤을 새우면서 흉계를 꾸며 계속 그 흉측한 몰골을 들어낼 것이다.

 

 콜로라도의 극장 학살이 발생한 직후 뉴욕 시 일부 영화관에는 'copycat crime (모방 범죄)'를 방지하기 위하여 상영시간에 경찰까지 출두했다 한다. 반영웅의 광기를 두려워하는 관객들에게 브루스 웨인은 영화에서 웨친다. "I am not afraid. I am angry!" 우리의 분노가 우리의 공포를 능가하기를 기원한다.

 

 외톨박이의 반사회적 기질을 해소하기 위하여 당신과 내가 자주 만나 정서를 나누는 일상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공존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반영웅적 성향을 극복해야 할 일이다그리하여 당신은 바람이 심하게 부는 어느 날 브루스 웨인처럼 검은 망토를 걸치고 어둠 속의 영웅으로 군림할지어다.

 

©서 량 2012.07.23

-- 뉴욕중앙일보 2012 7 25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