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61. 어린이 놀이터

서 량 2012. 7. 10. 12:21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졌던 친구에게서 어느 날 느닷없이 전화가 온 김에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치자. 요사이 뭘 하며 지내냐, 하고 물어 봤을 때 "응, 나 그냥 놀고 있지."라고 그가 대답했다면 그건 아무래도 백수건달로 빈둥대며 지낸다는 말이다.

 

이럴 때 우리가 무심코 쓰는 '놀다'라는 말은 좀 부정적으로 들릴 때가 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당신은 '놀다'에는 '쉬다'라는 좋은 의미가 숨어있다고 겸손한 표정으로 말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놀다'라는 단어는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인상을 풍기면서도 휴식한다는 뜻 또한 있는 것이 참으로 수상한 노릇이다. 

 

'노릇'이라는 말도 '놀이'나 '노름'처럼 '놀다'에서 생겨난 순수한 우리 말이다. 하다 못해 '노래'도 옛날 말 '놀애'처럼 '놀'자가 들어가고 심지어 '놀부'는 놀고 먹기 좋아하는 남자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는 걸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이쯤 해서 악기 얘기를 하면 어떨까. 

 

양키들은 악기를 연주할 때 꼭 'play'라는 단어를 쓴다. 이를테면 'play the piano', 'play the violin', 'play the saxophone', 'play the drums' 하는 식으로 얘네들은 어학적으로 악기를 '갖고 노는' 기색이 역력하고 도무지 악기를 연주하는 태도가 진지하지 못하다. 악기를 공부 한다기보다 엔조이하는 식으로 보인다.

 

우리는 피아노와 기타를 '친다' 한다. 어딘지 모르게 폭력적으로 들리는 말이다. 이를테면 당신이 쇼팽의 군대행진곡을 칠 때 피아노 건반이 아야, 아야,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찌 그리도 결백한 피아노를 함부로 취급하는가. 건반을 쳐? 때려? 당신이 조폭이야?

 

바이올린은 또 어떤가? 열 살도 안된 당신 아들이 도도 솔솔 라라 솔, 하며 흡사 촛불이나 횃불을 켜듯이 바이올린을 켠다고 치자. 악기 주위가 환해지는 환상이 일어나지 않는가.

 

나팔을 '분다' 한다. 마치도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손을 후후 불듯이 당신은 트럼펫이나 색소폰을 분다. 게다가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뜯는다 하지. 그 예민한 줄을 섬섬옥수로 지긋이 누르고 튕길 때 어찌 '뜯는다'는 발상이 떠오르는가.

 

‘연극’도 ‘play’라 한단다. 이때 역시 '연극'은 '놀다'에서처럼 이중성을 띈다. 우리는 감명 깊은 드라마를 보며 콧날이 시큰해지지만 '연극을 한다'는 말은 진실성이 없는 행동으로 치부한다. 같은 맥락에서  ‘play up to somebody’ 하면 호감을 사기 위하여 누구에게 아양을 떠는 것을 의미한다.  

 

‘play by ear’는 재즈연주자들이 악보도 없이 귀로 듣고 하는 연주하는 관습에서 생겨난 관용어로서 즉흥연주의 스릴과 예술감각을 높이 사는 말이다. 'fair play (페어플레이)'는 공정하고 떳떳한 스포츠 정신을 대변한다.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한 화제이기는 하지만 많은 이성과 사귀는 남녀의 행동을 'play the field'라 한다. 그래서 "Why don't you take it easy and play the field?" 하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사귀어 보아라." 하는 연장자로서의 충고가 될 수 있다.

 

여기에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고 치자. 아담한 농구 코트며 귀여운 계집애들이 운동장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는 정경도 떠오른다. 공놀이나 고무줄 놀이는 우리가 '먹고 사는' 생존 수단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므로 그 중요성을 묵살할 수도 있겠지만 정신적 놀이터가 없는 인생이란 참으로 삭막한 삶일 것이다. 오늘도 당신은 골프채를 매고 밖으로 나가거나 악기를 만지며 놀거나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쓰면서 풍요한 일상을 보내기를 기원한다.

 

 © 서 량 2012.07.09

-- 뉴욕중앙일보 2012년 7월 1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12/07/10/society/opinion/1441774.html

 

[잠망경] 어린이 놀이터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졌던 친구에게서 어느 날 느닷없이 전화가 온 김에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치자. "요사이 뭘 하며 지내냐" 하고 물어 봤을 때 "응, 나 그냥 놀고 있지"라고 그가 대답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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