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인터넷에 '멘붕'이라는 단어가 자주 뜨길래 구글 검색을 해 보았다. 멘붕은 'mental 붕괴'에서 '멘'과 '붕'을 합친 말이란다.
약자를 쓰고 싶으면 '정신적 붕괴'를 줄여서 '정붕'이라 할 것이지 멘붕이 무언가, 멘붕이. 우리는 왜 이리도 어설프게 영어를 우리말과 접목시키는가.
국어사전에 수록된 말의 70 퍼센트가 한자어라 한다. 우리말이 중국말에 완전 압도 당했다는 사연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누리'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살갑게 들린다. 인터넷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누리꾼'이라 부르는 것도 마음에 든다.
언제부터인지 누리꾼들은 '팅'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meeting'의 끝소리 '팅'을 '만남'이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오늘도 '소개팅'이나 '번개팅'이라는 단어가 인터넷을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돈다.
말에 영어가 들어가야 멋지게 들리는 경향은 사실 근래의 일이다. 옛날에는 한자를 들먹여야 유식하게 들리는 추세였고 그 잔재가 요즘도 사생결단으로 우리에게 군림한다.
2012년 1월 1일에 이명박 대통령이 임사이구(臨事而懼 - 걱정하는 마음으로 사태에 임한다)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는가 하면 바로 그 다음날 서울 시장 박원순은 수가재주 역가복주(水可載舟 亦可覆舟 -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라며 사자성어에 맞서서 팔자성어를 썼다는 소식이다.
매년 최소 한두 번씩은 지성인을 자처하는 나로서 솔직히 이런 한자말은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희망찬 한 해가 밝아오는 신년 벽두에 이 두 분 지도자들은 어쩌자고 이런 식으로 나를 도매값으로 열등감에 몰아 넣었는가. 왜 우리는 입때껏 남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한자를 들먹이며 언어의 사대주의를 헤어나지 못 하는가 말이다.
영어에도 사자성어에 해당하는 개념이 있는데 네 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된 말을 'four letter word'라 한다.
영어의 사자성어(?)는 주로 욕을 할 때 쓰는 말이다. 한자처럼 목에 힘을 주면서 다른 사람을 교시하는 말이 아니고 남을 모욕하는, 소위 바닥을 치는 인간의 심리가 꿈틀거리는 단어들이다. 중국인들의 역겨운 위선(僞善)에 비하여 양키들은 'four letter word'를 통해 속이 후련해지도록 위악(僞惡)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이렇듯 교훈 위주의 사자성어와 신성모독의 네 알파벳 단어는 인간의 겉과 속의 이율배반적인 면목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세상의 어느 언어에도 비속어는 꼭 한몫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욕이나 쌍소리도 삶의 일부분이라는 진리를 인정해야 될 것 같다. 언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던 굴지의 코미디언 조지 칼린(George Carlin: 1937-2008)이 설파한 티브이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일곱 개의 불결한 말 (Seven Dirty Words) 중에서 다섯 개가‘four letter word’다.
당신의 어학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검열당국을 의식하면서 일곱 단어를 더러움의 강도 순위대로 나열하면 ‘sh_t, pi_s, fu_k, cu_t,cocksu_ker, motherfu_ker,ti_s’가 된다. 첫째와 둘째는 배설물이고 셋째가 성교, 넷째는 여성 생식기, 다섯째는 남자의 동성애적인 행동, 여섯째가 근친상간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가 유방의 비속어다.
순수한 우리말은 어떠냐고? 위의 일곱 중에 1등과 3등이 글자 하나로 표기되는 것은 성급한 당신과 나의 의식구조 때문이라고 우겨 볼 생각이다. (나머지 중에도 두어 품목 또한 한 글자라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문이나 영어의 답답한 사자성어를 초월하여 일자성어를 좋아한다고나 할까.
© 서 량 2012.05.13
-- 뉴욕중앙일보 2012년 5월 16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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