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55. 막말을 다스리는 힘

서 량 2012. 4. 16. 19:56

 2012 4 11일 실시된 한국의 19대 총선을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한 국회의원이 심하게 '막말'을 한 사연이 선거의 승패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들었다.

 

 '' '마구'의 준말이다. '마구' '심하게, 아무렇게나, 함부로'라는 뜻으로 막걸리나 막국수 같은 말에 그런 뜻이 잘 깔려있다.

 

 ''에는 '맨 나중'이라는 뜻도 있다. 막차, 막내, 막판, 막바지 같은 말들이 좋은 예다. 근래에 유행하는 막장 드라마도 '막다른 골목'에서처럼 정작 갈데 까지 다 간 남녀의 절박감을 보여준다.

 

 '마구'라는 뜻으로 'random'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은 원래 고대영어로 '맹목적'이라는 뜻이었는데 13세기에 '급하게' 혹은 '함부로'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그리고 1980년대 대학생들 간에 저열하다는 뜻의 슬랭도 파생됐다.

 

 함부로 하는 짓거리나 앞뒤를 가리지 않고 분별 없이 하는 행동을 '마구잡이'라 한다. 그러니까 한자어로 무작위(無作爲)라 풀이되는 'random'은 다분히 급하고 천박하다는 뉘앙스가 깃들어져 있다.

 

 막말은 '막소리'의 동의어다. 이것은 마치도 쌍말을 '쌍소리'라 하는 것과 언어학적 이치가 같다.

 

 막말과 쌍말은 둘 다 나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뜻이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 함부로 하는 말이라 해서 꼭 쌍소리가 들어가라는 법이 없을 뿐더러 점잖은 한자어까지 쓰면서 하는 막말과 우리 고유의 육두문자(肉頭文字)가 애용되는 쌍소리가 아주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빈번하다.

 

 '쌍스럽다' 혹은 '쌍놈' '상스럽다' 혹은 '상놈'의 거센 발음의 우리말이다. 조선 시대 때 우리 사회는 양반과 상놈이라는 이분법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는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로 갈리는 현대적 이분법의 노예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이념은 고사하고라도 국토 자체가 남한과 북한이라는 지리적인 이분법에 시달리는 우리가 아니든가.

 

 '()스럽다'는 말이나 행동이 천하고 교양이 없다는 뜻으로 영어의 'ordinary people'에서 빌려온 우리말로 '보통 사람'을 지칭한다. 좀 유식한 말로 갑남을녀(甲男乙女)라고도 한다.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어릴 적에는 '상놈'은 장사꾼을 뜻하는 상()놈이라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을 달리해야 될 것 같다. 상놈은 양반이 아닌 일상인(日常人)이라는 뜻이다.

 

 1950년대 초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컴퓨터 용어로 'RAM' 'Random Access Memory'의 약자다.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는 기억이라는 뜻이다. 그 반대말은 'ROM', 'Read only Memory'.

 

 'RAM'은 임시방편의 기억인 반면 'ROM'은 콤팩트 디스크 같은 곳에 붙박이로 박혀있는 기억이다. 'RAM'은 컴퓨터를 끄는 순간 귀신처럼 사라지지만 'ROM'은 전원 스위치에 상관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기억이다.

 

 쉐익스피어의 햄릿 마지막 부분 5 2장에서 우울한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 "There is a divinity that shapes our ends. Rough-hew them how we will." (우리의 막판을 마무리해주는 어떤 신성한 존재가 있다. 아무리 우리가 마구잡이로 끝을 낸다 하더라도.)

 

 우락부락하게 생긴 바위도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점차 큰 바위 얼굴 같은 인자한 용모로 변하듯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은 당신과 나의 모진 성미에도 남의 말을 순하게 받아들이는 여유로움이 생기는 것 같다. 그것은 생의 막바지를 다스리는 어떤 신성한 힘의 소치다. 근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성미가 더 고약해지는 사람은 어쩌냐고?

 

 

©서 량 2012.04.15

-- 뉴욕중앙일보 2012 4 18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