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내가 'American Idol'을 유심히 보는 이유는 22살의 뉴욕 출신 한국 청년 한희준(Heejun Han)이 최종 결승 13명에 뽑혔기 때문이다. 나 또한 뉴욕에 사는 한국인으로 아주 뿌듯한 심정으로 그의 활약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2002년에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미 전역에서 응모한 젊은이들 중에서 일년에 한 명씩 어김없이 가수를 탄생시켜 왔고 명실공히 미국 티브이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단다.
한국에서도 전국민이 열광하는 젊은이들의 그룹 사운드를 미국식으로 '아이돌 그룹 (idol group)'이라 부른다. 근 20년 전에 데뷔한 서태지로부터 최근 미국에 멋지게 발을 디딘 소녀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idol' 그룹의 역사도 또한 막강하다. 나훈아와 이미자 시대를 관통한 우리의 요즘 가요 풍조.
외래어 표기법에 대하여 한 마디 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 그것은 즉, 'idol'은 소리 그대로 'o' 발음을 죽이고 '아이들'이라 표기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발명왕 'Edison'을 '에디손'이라 하지 않고 '에디슨'이라 발음하듯 말이지.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굳이 'o' 소리를 살려서 '아이돌'이라 발음한다. 혹시 '아이들'이라 하면 애들이 노래하는 것으로 착각을 할까 봐 그런 것인지.
'idol'은 13세기 중반 고대 불어와 후기 라틴어에서 '이미지 (모양)'이라는 뜻이었고 특히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로는 '틀린 모양 (false image)'이라는 의미였다. 내가 만약 고유한 우리말을 우습게 알고 한자를 들먹이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진작부터 'idol'을 '우상'이라 엄숙하게 선언했을 것이다.
16세기에 셰익스피어 보다 세 살 위였던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이 과학계를 향하여 목이 아프도록 주창한 '베이컨의 4대 우상'이라는 것이 있다.
베이컨은 과학자들이 추종하는 순 엉터리의 존중의식을 당신이 아야! 아야! 할 정도로 아프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는 지식인들이 받드는 네 개의 우상을 종족우상, 동굴우상, 시장우상, 극장우상으로 분류한다.
종족우상이란 인류라는 종족이 무작정 전통을 추종하는 터무니없는 편견이고 동굴우상은 우물 안의 개구리 식 사고방식을 대변한다. 시장우상은 우리가 쩔쩔매는 말장난의 노예상태를 지칭하고 극장우상은 무대배우들의 드라마틱한 궤변 따위에 매달리는 우리의 지적인 오류를 뜻한다.
그래서 종족우상은 어느 어줍잖은 시인이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는 나를 떠나는 내 님의 옷자락 소리다'하는 발언이고 동굴우상은 정신과에서 모든 정신병은 약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우기는 의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시장우상이란 처음에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꽃의 이름을 불러줬더니 꽃이 비로소 저한테 와서 진짜 꽃이 됐다는 그 터무니 없는 착각을 지칭하고 극장우상은 당신이 눈에 쌍심지를 세우고 명언, 명창, 명시, 명품, 명문대학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잘못된 심리상태를 일컫는다.
'idol'은 본래 뜻, '형상'이라는 한자어를 순수한 우리말로는 '꼴'이라 한다. 초등학교 때 배우던 사다리꼴이나 마름모꼴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한자라는 시장우상을 내팽개치고 '꼴'이라는 우리말을 쓰면 어떨까. 저 꽃 미남들이 다리를 쩍쩍 벌리며 춤을 추는 '아이돌 그룹'을 '꼴 그룹'이라 부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메리컨 아이돌' 대신 '미국 꼴'이라 하면 더 재미있게 들릴 것이고.
그나저나 나는 한희준이가 꼭 올해에 미국을 휩쓰는 최종 가수로 뽑히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구촌을 마구 흔드는 한류(K-Pop)의 거대한 우상을 보고 싶다.
© 서 량 2012.03.04
-- 뉴욕중앙일보 2012년 3월 7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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