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중세기에 걸쳐 일본을 주름 잡던, 참을 인자에 놈 자, '닌자 (ninja: 忍者)'라는 비밀단체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새까만 옷에 복면을 하고 지붕이며 나무를 훌쩍훌쩍 뛰어넘는 첩보대 요원들이 신출귀몰하게 자객행위를 하는 영화를 유심히 본 적이 있는가.
병상일지를 쓸 때 수도 없이 'patient: 환자'라는 단어를 쓰면서 그 글자의 원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근래에 미국 정신과 분야에서 환자를 'client: 의뢰인' 혹은 'customer: 고객'이라 부르자는 의견이 분분하다. 참을성이 없는 양키들이 참는다는 뜻이 담긴 'patient'라는 호칭을 되도록 피하려 한다. 그나저나 닌자와 환자의 뜻이 같다는 점이 좀 우스꽝스럽다.
옥편에 환자(患者)의 '환'자는 '근심, 걱정'이라 나와있다. 이것은 즉 마음 속에 근심과 걱정이 심한 사람들이 육체적인 병을 일으킨다는 점을 암시하기도 한다.
라틴어에서 14세기 초부터 쓰이기 시작한 'patient'의 전신인 'patientem'은 '불평하지 않고 참고 견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14세기 말에 고대 불어로 'pacient'는 어느새 인칭대명사로 둔갑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변천했다.
그것이 지금부터 한 800여 년 전 유럽의 풍조였다. 같은 상황을 두고 로마인들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점에 역점을 두었고 프랑스인들은 고통을 '당하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불현듯 생각에 잠기게 한다. 역경을 극복하려는 로마인들의 자세와 역경을 당한 희생자로서 자칫 남들의 연민과 동정심을 자극하며 신세타령에 매달리는 프랑스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스스로 어떤 상황을 극복하느니 보다 남의 힘을 빌리고 싶다.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존하는 방식도 역경을 타개하는 일환이 될 수 있거늘 하다 못해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김유신도 당나라 소정방의 힘을 빌리지 않았던가. 남의 힘을 빌린다는 말은 급할 때 신용카드를 쓰는 것과 진배없다. 신용카드로 빌린 돈은 나중에 두고두고 높은 이자율로 갚아야 한다. 그래서 김유신 이후로 우리 선조들은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거액의 이자를 지불해야 했던 것인가.
내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참을성을 권장하는 정신과의사로서 성경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것은 즉 예수의 동생 야고보(James)가 당시의 해외거주 유대인들에게 쓴 서한으로 해석되는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중략) --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 하는 구절이다. 온통 목에 힘을 쫙 빼고 알기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역경을 참고 견디면 시쳇말로 대박이 터질 수 있다는 훌륭한 지혜로 풀이된다.
'patient'와 같은 말 뿌리로 'passion'이라는 드라마틱한 단어가 12세기에 있었다. 고대 불어로도 이미 스펠링 하나 틀리지 않고 'passion'이라 표기했다. 이 말은 워낙 전인도유럽어로 '상처를 준다'는 의미였다.
'passion'이 '정열'이라는 뜻으로 변하기까지는 근 5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17세기였다. 다시 말해서 시험을 참아내는 사태나 역경을 극복하는 로마인의 심리나 희생자의 청승맞은 입지를 굳힌 프랑스 사람들이나 김유신이 당나라라는 신용카드를 썼던 역사적 사실이 알고 보면 다 한통속이라는 해석을 내려도 무방하다.
16세기에 'passion'은 '성욕'이라는 뜻이었다. 정신과 의사 티를 내면서 굳이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내게 상처를 준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될 듯싶다. 그만큼 우리들의 사랑은 서로를 아프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서 량 2012.03.18
-- 뉴욕중앙일보 2012년 3월 2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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