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51. 제정신

서 량 2012. 2. 20. 08:40

미국에 이미 뿌리박은 당신이 그 뜻을 잘 알고 있는 'sanity'라는 말을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어렵다.

 

사전을 찾아보니 '제정신'이라 나와있다. 맞다. 'sanity'는 '온전한 정신'이라 하지 않고 '제정신'이라 해야 귓속에 쏙 들어온다. 'sane'과 'sanity'의 반대말은 'insane'과 'insanity'.

 

'Are you insane?'을 '너 제정신이 아니지?'라 하는 대신 '너 제정신이냐?' 해야 제대로 들린다. 양키들은 굳이 상대가 실성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반면 우리는 상대의 정신이 멀쩡하다는 사태를 확인하려는 심리가 어쩌면 그리 정반대일까.    

 

영어와 우리말 표현이 늘 상반적인 것만은 아니다. 미친 짓을 한 사람에게 'Are you out of your mind?' -- 당신 정신 나갔어? -- 하며 버럭 소리치는 마음가짐은 서로가 비슷하다. 단지 양키들은 사람(you)이 마음 밖으로 나가는 반면 우리는 '정신'이 몸을 떠난다는 것뿐. 어쨌든 인간은 몸이건 마음이 '내비게이터'도 없이 갑자기 외출하는 상태를 몹시 꺼리는 모양이라.

 

옛날 내 대학 동기동창처럼 보이는 23세의 동양 청년이 양키와 흑인들 틈에 끼어서 농구 하는 장면을 보았다. 요즘 뉴욕 농구팀 'Knicks'에서 뛰는 동양인 선수 'Jeremy Lin' 이야기다.

 

마치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예측을 불허하는 광적인 활약을 한 '린'을 미 스포츠에서는 엊그제부터 'Linsanity'라 별명 했다.

 

'Linsanity'는 미쳤다는 뜻의 'insanity' 앞에 '린'의 첫 알파벳 'L'을 붙여서 만든 합성어다. 그리고 'Lin'과 '제정신'이라는 'sanity'을 합친 글자이기도 하다. 뉴요커들은 "He is the missing piece!"-- "걔만 있으면 된다!"고 외친다.

 

'Linsanity'에 대하여 스포츠 채널 'ESPN'이 맨해튼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의 반응 또한 아주 광적이다. 뉴요커들은 뉴욕 농구팀을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명문대 하버드 출신 동양인 '린'에게 강도 높은 희망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진작 인류의 역사상 농구라는 스포츠는 백인과 흑인들, 그야말로 키가 빨래장대만 한 사람들의 놀이터였거늘. 오죽하면 타임지가 "제레미 린이 농구문화를 바꿔 놓았다"라 할만하지 않은가.

 

'sanity'는 15세기 라틴어의 'sanitas'에서 유래한 말로 '건강하다'는 뜻이었다. 16세기에 접어들어 바로 '정신건강'이라는 의미가 됐다. 이쯤 되면 육체와 정신 사이에 건강이 왔다리 갔다리 하는 상태다. 차제에 나 또한 정신과 의사답게 한마디 하자면, 몸이 마음이요 마음이 곧 몸이 아니던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따로 없어요. 제 몸이 있어야 제 정신이 제대로 박히는 법이려니.

 

상기의 'sanitas'에서 불어의 'sanitaire', '건강하다'는 뜻이 나왔다. 그러나 아뿔싸, 19세기 후반에 저 발칙한 프랑스인들의 영향을 받아 'sanitary pad'는 '생리대'를 뜻하게 된 것이 참으로 괴이하다. 그보다 한 술 더 뜨기를, 1939년에는 'sanitation'은 미국영어에서 '쓰레기'의 아주 점잖은 표현이 됐다. 그래서 요사이도  '쓰레기 수거인'을 'sanitation worker'라 부른다.

 

갑자기 슬퍼진다. 정신과 육체의 건강이라던 'sanity'가 어느새 생리대와 쓰레기라는 뜻으로 전락했는가. 아무리 극과 극이 통한다 할지라도 건강하다는 말이 더러운 것과 상통하다니. 현명한 당신이여, 어서 말해다오. 언제부터 청순한 정신건강과 생리대와 쓰레기가 서로들 끼리끼리 꿍꿍이 속으로 내통해 왔다는 말이냐.

 

© 서 량 2012.02.19

-- 뉴욕중앙일보 2012년 2월 22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