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38. 왕의 명칭

서 량 2011. 8. 22. 09:55

 선거철이 다가오면 티브이에서 사극(史劇)이 인기를 끈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시청자들은 역사적 영웅들의 극중 리더십에 관심의 초점을 모은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의 호칭에 소인, 소생, 소자, 소첩 등등 '작을 소()'자를 써서 스스로를 왜소하게 보이게 했다. '소인'에다가 접미사 ''를 붙인 '소인네'를 줄여서 '쇤네'라고도 한다. 나는 어릴 적에 그들이 목욕을 안 해서 몸에서 쉰내가 나기 때문에 쇤네라고 부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상대를 높이는 겸양지덕이면서 도전의식보다는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속셈이다. 마치 '예쁘다'는 말의 본 뜻이 '불쌍해 보인다'인 것에서 유래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사극에서는 왕도 자신을 과인(寡人)이라 부르며 자기비하의 본때를 보여준다. 과인은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 남편이 죽어 홀몸인 과부(寡婦)에도 말수가 적은 과묵(寡默)한 사람에도 같은 ''자가 들어간다.

 

 'thou' 17세기경 표준 영어에서 사라진 'you'의 경어다. 이 우아한 인칭대명사는 영국의 제임스 왕이 처음 편찬한 영어성경에 쓰인 존칭이었고 셰익스피어가 애용했던 호칭이었고 우리말로 '그대'라 번역하면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는 아어(雅語). 십계명의 여섯 번째도 'Thou shalt not kill' 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만 'You shall not kill' 하면 별로 경건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우리가 자기비하에 급급하는 동안 양키들은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높여주는 말 습관을 익혔다. 14세기쯤 해서 왕이나 지체 높은 사람을 부를 때 그들은 이미 'your Highness', 'your Excellency', 또는 'your Majesty' 같은 미사여구로 상대의 품위와 탁월성과 위대함을 칭찬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인과 과인을 합친 작고 부족한 힘은 서구적 자아와 'your Majesty'의 높은 합계치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   

 

 위에 열거한 영어 경칭을 우리는 폐하(陛下: 뜰 층계 아래), 전하(殿下: 큰집 아래), 또는 각하(閣下: 집 아래)로 번역한다. 무릇 왕을 뜻하는 호칭에 '아래 하()'가 들어가다니 이것이 어찌된 영문인가. 혹여 국왕을 하대(下待)하는 뉘앙스라도 숨어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건 오해다. 당신은 화려한 관복을 입은 병조판서가 머리를 조아리며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하며 읊조릴 때 그가 일국의 왕을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주의력을 자신이 엎드려 있는 전각의 아래 쪽으로 유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상대의 관심을 자기 쪽으로 이끌기 위한 '여보세요'에 해당하는 우리 특유의 간투사인 것이다.

 

 그렇다. 양키들은 자기의 관심을 상대에게 주려 하고 우리는 상대의 흥미를 내 쪽으로 유인하려 한다. 상대를 사랑하는 심정보다는 상대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 즉 남을 예뻐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심리다.

 

 티브이에서 누가 걸쭉한 목소리로 "상감마마(上監媽媽) 납시오!" 하고 소리친다. 이 호칭은 '아래 하' 대신에 '위 상()'자가 들어갔기에 반갑기가 그지없다. 그러나 '어머니 마()'를 어찌하랴. '위에서 살피는 말을 탄 여자'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상감마마'의 뒤를 이어 태자마마 또한 사내다운 풍모로 천천히 납신다.

 

 역신(疫神)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우리의 조상들은 천연두(small pox)를 한자의 최고 경칭인 '마마'라 불렀다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가. 몹쓸 전염병과 일국의 왕에게 똑같은 함자를 붙이다니. 아무리 역사 속의 그들이 무분별하게 중국말을 일상에 도입했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정말 너무했다.

 

 

© 서 량 2011.08.21

-- 뉴욕중앙일보 2011 8 24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