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137. 죽부인과 섹스 토이

서 량 2011. 7. 25. 05:58

 ...어깨와 다리를 안온하게 펴고 기대면 /내 이불 속으로 정답게 들어오네 /비록 다소곳이 남편 밥상 시중은 들지 못하지만 /다행히도 방안의 내 몸을 독차지하네...

 

 고려 시대 시인 이규보(1168~1241)의 시「죽부인(竹夫人)」 일부를 번안해 보았다. 죽부인이란 손가락 정도 너비의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원통 모양으로 만든 옛 침구를 일컫는다. 그것은 요사이처럼 무더운 여름 밤에 품고 자면 몸에 통풍이 잘 되어 잠이 잘 왔던 관계로 남정네들이 즐겨 쓰던 피서 도구였다.

 

 죽부인은 영어로 'bamboo wife'라 하지 않고 'Dutch wife'라 한다. "Dutch wife"는 원래 옛날 네덜란드 상인들이 인도네시아를 드나들면서 그곳에 현지처를 두었던 관습에서 생겨난 말이었지만 현대에는 얼추 애첩이라는 뜻의 속어다. 우리 선조들의 애첩은 살아 숨쉬는 여인이 아닌 대나무로 제조된 기구였다.  

 

 일본에서는 플라스틱 제품 섹스용 인형을 'Dutch wife'라 부른다. 대략 5천 달러 남짓한 가격으로 시판되고 있으면서 구글 검색으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는 실물대의 성인용품이다.

 

 네덜란드(홀란드) 사람을 뜻하는 'Dutch'가 슬랭에 자주 등장한다. 'Dutch pay'는 음식 값을 각자각자 부담하는 경우이고 남에게 엄숙하게 훈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Dutch uncle (홀란드 아저씨?)'라 한다. 마음이 나약한 남자가 술의 힘을 빌려 발휘하는 용기라는 뜻의 'Dutch courage'도 생각해 보면 네덜란드 국민을 크게 칭송하는 내막은 아닌 듯싶다.

 

 영국인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을 싸잡기 좋아하고 프랑스 사람들도 얕잡아본다. 예컨대 그들은 쌍소리를 하고 난 다음에 "Excuse my French!"라면서 금방 자기가 내뱉은 말이 영어가 아니라 불어인 것처럼 억지를 부린다. 만국공통의 남녀 애무행위인 'French kiss'도 프랑스 사람의 전유물인 것처럼 이름한다. 또 있다. 여럿이 모인 파티 같은 데서 온다 간다 인사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행동을 'French leave'라 하는데 그것도 예절을 존중하는 영국식 우월감이 듬뿍 깃든 말이다.

 

 'Too many chiefs and not enough Indians'라는 잠언은 높은 사람들만 많고 실무자가 없다는 뜻인데 이 말에서 인디언은 직책이 낮은 신분을 대표한다. 여름이 다하기 전에 한 번 더 기승을 부리는 늦더위 'Indian summer'도 구질구질함의 대명사로 들리고 인디언들은 'Indian giver'에서처럼 남에게 선물을 줬다가 다시 빼앗고자 하는 치사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중국도 영어의 비판적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말로도 '호떡집에 불 났다' 하지만 'Chinese fire drill (중국인들의 소방훈련)'이라는 속어 또한 시끄럽고 떠들썩한 상황을 실감나게 전달한다. 반면에 'Chinese whisper'는 속삭이는 중국인이 아니라 터무니 없이 와전된 소문을 의미한다.

 

 며칠 전(7 19) 'BBC Magazine' 인터넷 판에 영국인들이 불평하는 미국식 영어, 'Americanism' 중에서 가장 괘씸한 50개의 본보기가 실린 것을 읽었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잘 지낸다는 뜻으로 'I am good'이라 하는 대신 'I am well'이라 해야 한다며 강도 높게 투덜댄다.

 

 언어의 변천사는 인류 역사의 발자취다. 고리타분한 영국식 문법과 격식을 가차없이 깨뜨리는 미국영어가 이제 지구촌의 언어를 지배하고 있다. 이 거대한 흐름의 변방에서 이규보의 서늘한 죽부인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한여름에 섹스 토이로 둔갑하고 있는 광경을 본다.

 

 

© 서 량 2011.07.24

-- 뉴욕중앙일보 2011 8 10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