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라는 뜻의 'weather'는 고대영어로 'weder'라 했는데 원래 '바람' 또는 '바람이 분다'는 의미였다. 말 뿌리가 같은 'wither'는 빛이 바래거나 꽃, 혹은 애정 같은 것이 시든다는 뜻으로서 바람이 불면 수분이 고갈되는 이치를 담은 단어다.
당신은 황량한 요크셔 벌판의 폐가를 배경으로 하여 1847년에 출판된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을 기억하는가. 저자 에밀리 브론테는 그 소설 속에서 'wuthering'이 'withering'의 영국 북부 사투리로 폭풍이 휘몰아친다는 뜻이라고 몸소 설명한다. 그 당시 'weather'와 'wither'와 'wuther'는 서로 같은 뜻이었다.
16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weather-beaten' 또한 햇볕에 타고 비바람에 시달리며 '풍파를 겪었다'는 말이다. 바람을 빼놓고 하는 기후 이야기는 크리스마스를 빼놓은 겨울 이야기만큼이나 시시하다.
'weather'의 현대 의미는 바람이 아닌 '날씨'다. 금세기 도시인들은 여러 기상현상 중에서 비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들이 외출할 때 우산을 준비할까 말까 하며 안달하는 모습을 보라. 그러나 중세의 양키들은 바람이 세게 불어 허술한 집 지붕이 날아가느냐 않느냐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미당 서정주가 자기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설파했듯이 중세 양키들 대부분의 일상을 바람이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미 동부는 얼마 전 허리케인 아이린이 남긴 여파에 아직도 시달리고있다. 큰 나무를 송두리째 흔드는 뉴욕 근교의 강풍을 보여주며 그때 TV에서는 허리케인이 폭풍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연발했다. 풍속이 74마일 이하로 떨어지면 더 이상 허리케인이라 부르지 않는 바람의 분류법을 기억하며 우리는 마음씨 온순한 폭풍을 맞이하는 순간을 염원했다.
나는 허리케인과 태풍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대충 태평양에서 일어나는 대형폭풍을 태풍이라 하고 대서양을 휩쓰는 특급폭풍을 허리케인이라 하면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typhon'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거인으로 신의 총대빵 제우스에게 도전했던 엄청나게 난폭한 괴물이었고 그의 이름에서 '태풍'이라는 뜻의 'typhoon'이 유래했다 한다. 태풍은 영어의 'typhoon'뿐만 아니라 아랍어 'tufan', 중국어 '태이풍'과 함께 음성학적으로 혹시 만국 공통어가 아닐까 싶다.
허리케인과 태풍의 이름에 대하여 생각한다. 만화 같은 데에 머리칼이 귀신처럼 길게 그려지는 옛날 허리케인은 무자비한 홍수를 일으키고 상상의 한도만큼 긴 손톱으로 지구 껍질을 박박 할퀴는 여자의 형상과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여성운동가들이 들쑤시는 바람에 1979년부터는 허리케인 이름에 남자도 명함을 디밀게 됐지만 왠지 자연재해는 원천적으로 여자를 연상해야 제격이다. 자연을 'Mother Nature'라 하고 절대로 'Father Nature'라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소치다.
동양에서는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태풍에게 사람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풍에게 매미, 메기, 너구리, 독수리 같은 동물 이름을 붙이고 북한에서도 역시 기러기라는 청승맞은 이름을 쓰는 범례를 구글 검색으로 배웠다. 워낙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극구 피하는 습관이 있기에 태풍을 사람 취급 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끽해야 영식이 어머니, 충주댁, 하며 자녀 이름이나 지명을 들먹이고 술좌석에서도 과장님, 부장님 같은 직함 따위나 호명하며 사람조차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우리들이 어찌 함부로 태풍을 철수, 영자라 부르겠는가.
© 서 량 2011.09.03
-- 뉴욕중앙일보 2011년 9월 7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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